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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도 사랑하세요"…아직도 생생한 큰 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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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 7주기 맞아 전기 '아, 김수환 …' 출간

서울대교구 인가한 첫 공인 전기
일기·미사 강론·인터뷰 등 참조
추기경의 삶과 정신 되살려내



[ 고재연 기자 ] “추기경님, 이런 고급 차를 타고 다니시면 길거리의 사람 떠드는 소리도 안 들리고 고약한 냄새도 안 나겠네요.”

1969년 5월, 선물로 받은 캐딜락을 함께 타고 가던 수녀가 던진 농담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사진)은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날 밤 그는 주교관 3층 성당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가난한 옹기장이 집안에서 태어났기에 누구보다 가난한 사람의 처지를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위 성직자가 돼 자신도 모르는 사이 교만해졌다는 사실에 괴로웠다. 그리고 깨달았다. 추기경은 사람들이 고개를 들어야 보이는 곳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 옆에 있어야 한다는 평범한 사실을…. 김 추기경은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캐딜락을 돌려보냈고, 평생 좋은 차는 타지 않았다.

오는 16일 김 추기경의 선종 7주기를 앞두고 그의 전기 《아, 김수환 추기경》(김영사)이 출간됐다. 1권 ‘신을 향하여’, 2권 ‘인간을 향하여’로 나뉘어 나온 이 책은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인가한 최초의 공인 전기다. 《간송 전형필》 등의 전기로 유명한 이충렬 작가가 김 추기경의 개인 일기와 미사 강론, 언론 인터뷰, 개인 메모 등 각종 기록을 참조해 책을 엮었다. 저자는 추기경이 서울대교구장일 때 비서신부이던 장익 주교(전 춘천교구장)를 비롯해 고인과 친분이 있던 21명의 인터뷰를 통해 추기경의 삶을 생생하게 되살려냈다.

일제강점기인 1922년 대구 남산동에서 옹기장이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김 추기경은 열두 살 때 어머니의 권유로 소신학교에 들어갔다. 일본 유학을 거쳐 서울 혜화동 성신대(현 가톨릭대)를 졸업하고 사제가 된 김 추기경의 삶을 확 바꿔놓은 것은 ‘그리스도 사회학’을 공부하러 떠난 독일에서 접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였다. 교회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세상과 소통하고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공의회의 사목 목표를 듣는 순간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게 김 추기경은 가장 든든한 ‘빽’이었다. 군부독재 시절 갖은 압박 속에서도 약자의 편에 섰다. 1971년 성탄미사에선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 시도를 질타했고, 1979년 12·12 사태 후 새해 인사를 온 전두환 장군에게는 “정권이 서부활극 모양으로 돼선 안 된다”며 일침을 놓았다.

전기에는 김 추기경의 행적과 고뇌는 물론 그간 풀리지 않던 의문에 대한 답도 담겨 있다. 한국 천주교 교구 중에서도 가장 작았던 신설 마산교구의 신출내기 주교가 2년 후 어떻게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되고, 그 이듬해 세계 최연소 추기경에 임명됐는지에 대한 추론도 눈길을 끈다. 저자는 교황청 기관지 보도 등을 바탕으로 몇 가지 이유를 추려냈다. 독일 유학 시절 요제프 회프너 교수신부 밑에서 공부한 덕분에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과 문헌에 정통하다는 것, 젊기 때문에 나이 든 보수적인 추기경이 주도하는 교황청 회의에서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젊은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는 것, 1968년 시복식을 계기로 한국이 ‘순교자의 나라’로 주목받으면서 한국 가톨릭 위상이 높아진 것 등이다.

종교를 떠나 가슴에 새길 만한 어록도 눈에 띈다. 1966년 마산교구장 착좌식에선 “서로에게 밥이 돼 주십시오”라고 했다. 한없이 자신을 낮추고 몸을 나눠준 예수님처럼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 도와주는 존재가 되라는 얘기였다. 2007년 자화상 ‘바보야’ 전시회를 하면서는 이렇게 말했다. “있는 그대로 인간으로서, 제가 잘났으면 뭐가 잘났고, 크면 얼마나 크며,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안다고 나대고 어디 가서 대접받길 바라는 게 바보지. 그러고 보면 내가 제일 바보같이 산 것 같아요.”

2009년 2월16일, 폐렴 증세로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자 김 추기경은 마지막 인사를 이렇게 건넸다. “나는 너무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여러분도 사랑하세요.” 다음날 두 명의 시각장애인이 각막이식수술을 받고 빛을 되찾았다. 김 추기경이 남긴 마지막 사랑이었다. 김 추기경이 이렇게 묻는 것 같다. 무엇이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이냐고.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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