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원·긴축경영 한파 속 사라진 '연말 특수'
강남역 대리기사 "밤 12시 되면 콜 끊겨"
광화문 호프집 "예약 꽉 찬 날 작년 절반"
가족 모임 많은 외식업체는 그나마 선방
[ 임현우/강진규 기자 ] “작년 이맘때는 가만히 있어도 콜이 쏟아졌는데 요즘은 우리가 찾아다녀야 해요. 그나마 밤 12시가 지나면 거의 다 끊겨요.”
지난 23일 밤 11시께 서울 강남역 인근에서 만난 대리운전 기사 김모씨. 500m 정도 떨어진 신논현역에서 배차 신청을 받은 그는 “지금 시간을 놓치면 오늘 영업은 허탕”이라며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옆에 있던 동료 박모씨는 “대리운전의 피크타임이 갈수록 앞당겨지고 있다”며 “연말에도 지하철 막차 시간 이전에 술자리를 끝내려는 분위기 때문”이라고 했다.
기업들의 구조조정 한파 속에 주요 상권의 ‘연말 특수’도 사라졌다. 여의도, 광화문, 종로, 강남 등 이른바 ‘오피스 상권’의 자영업자들은 단체 회식이나 송년회 예약이 눈에 띄게 줄었다고 입을 모았다.
◆얇아진 샐러리맨 지갑
광화문 일대 직장인들이 많이 찾는 다동의 호프집 ‘태성골뱅이’의 한 직원은 “작년 말에는 3주간은 성수기였는데 올해는 예약이 꽉 찬 날이 열흘 정도밖에 안 된다”며 “마감 시간은 새벽 2시지만 밤 12시가 되기 전에 가게가 거의 빈다”고 말했다.
여의도의 회식 명소로 꼽히는 ‘흑돈가’는 이달 매출이 1년 전의 90% 수준에 그치고 있다. 10년째 일하고 있다는 한 종업원은 “증권사들이 안 좋다 보니 단체회식은 크게 줄었고 가족모임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말했다.
식사를 하고 있던 증권사 직원 최모씨는 “회사 측에서 ‘회식은 1차에 끝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며 “법인카드 한도도 대폭 삭감되다 보니 회식을 아예 안 하는 팀도 있다”고 했다.
허리띠 졸라매기에 나선 기업들이 늘면서 회식자리 메뉴 역시 ‘긴축 모드’다. “꽃등심을 찾던 단골들이 돼지갈비를 주문한다”(무교동 제일가든), “8000원짜리 수입맥주 대신 하이트나 카스”(역삼동 슬링 브런치&펍), “탕수육 아니면 잘해야 유린기”(여의도 밍1956)라는 것이다.
◆꽃집·사우나·스크린골프도 썰렁
조용한 송년회가 늘자 대리운전은 물론 사우나, 스크린골프장 등도 썰렁한 모습이다. 다동의 한 사우나 직원은 “회사원들이 술을 조금만 먹고 일찍 귀가하면서 매출이 작년 절반으로 줄었다”고 했다. 무교동 골프존의 이모 사장도 “작년 연말에는 일찍 예약이 찼는데 올해는 20% 이상 비어 있다”고 밝혔다.
기업들이 승진 인사를 최소화한 탓에 꽃집들도 울상을 짓고 있다. 무교동 꽃집의 황모 사장은 “그나마 주문하더라도 15만원이나 20만원 대신 10만원짜리로 주문이 몰린다”고 말했다. “길 건너 대우조선해양 같은 곳이 다 우리 단골이었어요. 기업들이 어려워지면서 주변 상가까지 흔들리니 기분이 착잡합니다.”
대신 직장인들의 얇아진 주머니 사정을 겨냥한 ‘가격파괴형’ 점포가 상권을 파고들고 있다. 여의도의 한 빌딩에는 ‘2000원대 아메리카노’를 파는 저가 커피전문점 네 곳이 일렬로 붙어 있다. 모두 테이크아웃을 해 가려는 손님들이 줄을 서 있었다. 한국투자증권에 다닌다는 이모씨(34)는 “비싼 커피를 척척 쏘는 게 요즘은 서로 부담스럽다”며 “저렴한 가격의 카페가 많이 생겼고 이런 곳들이 잘 되는 것 같다”고 했다.
◆가족 단위 모임 예약은 늘어
요즘 그나마 장사가 되는 점포들은 친구나 연인, 가족 단위의 소규모 모임이 많은 곳들이다. 이날 오후 8시께 강남역 인근의 한 치킨집은 가볍게 ‘치맥(치킨+맥주)’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10여개 테이블이 꽉 찼다. 여의도에서도 데이트 장소로 인기가 높은 ‘올라’와 ‘매드포갈릭’ ‘애슐리 마린’ 등은 연말까지 거의 모든 날의 예약이 마감됐다. 외식업체 강강술래의 이종화 차장은 “대기업과 금융사 인근 점포는 부진하지만 가족 단위 손님이 많은 쪽은 장사가 나은 편”이라고 설명했다.
임현우/강진규 기자 tardi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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