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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스케이, LCD 장비 국산화 주도한 '수출 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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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회 '한국을 빛낸 이달의 무역인'

1997년부터 일본 장비 대체…"연구개발할 때 가장 행복"

LG 등 국내 대기업 납품…중국 판다그룹과 100억 계약도
미래먹거리는 태양광전지



[ 이지수 기자 ]
디에스케이는 LCD(액정표시장치) 검사장비 에이징(aging) 시스템을 1997년 개발했다. 첫 국산화였다. 국내 기업이 전부 일본산 제품에 의존하던 때였다. 당시 LG전자 LCD사업본부(현 LG디스플레이)에 30억원어치를 납품했다.

이후 LCD접착(본딩) 기술과 경화(디스펜서)장비 등도 국산화했다. 2009년에는 코스닥에 상장했다. 지난해 매출은 350억원, 수출 비중은 60%를 넘는다. 이런 성과를 인정받아 김태구 대표는 제84회 ‘한국을 빛낸 이달의 무역인상’을 받았다. 한국무역협회와 산업통상자원부, 한국경제신문사는 수출 확대와 고용 증대에 기여한 중소 수출기업인을 매달 한 명을 선정해 시상하고 있다.

◆부품·소재까지 국산화

청년 시절 김 대표의 꿈은 대기업 사장이 되는 것이었다. 그는 1986?건국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럭키금성그룹(현 LG그룹)에 입사했다. 금성사(현 LG전자)로 발령받아 비디오 자동화기술 연구실에서 공정개발업무를 맡았다. 그는 “금성사 사장이 되는 것이 당시 목표였다”고 말했다.

8년간 연구개발(R&D) 한우물을 팠다. 집이 있는 한남동에서 경기 오산 공장을 오가며 일했다. 오후 11시가 넘어서야 집에 올 수 있었다. 버틸 수 있었던 건 일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다. 그는 “당시는 내가 설계한 프로그램대로 움직이는 로봇을 보기만 해도 희열을 느꼈다”며 “사업을 하는 지금도 공정을 설계하는 것이 설렌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1993년 갑작스럽게 퇴사를 결심했다. 각종 인사조치가 업무 성과와 크게 관계없이 이뤄지는 데 염증을 느꼈던 것. 그는 “내 손으로 회사를 일궈 사장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이후 1995년 퇴직금 1200만원을 들고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디에스케이를 창립했다.

이 회사는 1997년 첫 국산 LCD 검사장비 개발 이후 장비와 부품소재 국산화에 몰두하고 있다. 자체 개발한 LCD 본딩 기술과 인라인 시스템은 국제적으로 기술경쟁력을 인정받았다.

10년 전 시작한 리니어 모터 사업도 지속해서 성과가 나오고 있다. 리니어 모터는 회전운동이 아닌 직선운동을 통해 동력을 발생시킨다. 각종 LCD, 반도체, 엘리베이터 장비 등에 쓰인다.

◆태양광전지로 사업확대

중국은 최대 고객이자 경쟁상대다. 디에스케이의 해외 매출 가운데 90% 이상이 중국에서 나온다. 지난 9월에는 중국 판다그룹과 100억원 규모의 LCD장비 공급 계약을 맺었다. 지난해 매출의 29% 수준이?

김 대표는 “국내 기업들이 LCD 세계 1, 2위를 다투지만 중국의 추격이 거세다”고 말했다. 그는 반도체 분야와 마찬가지로 LCD 분야의 인력 유출이 심각한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중국 업체들이 한국 기업의 3배가 넘는 연봉을 제시하며 우수 인력을 싹쓸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세계 3위 LCD업체로 성장한 중국 BOE그룹을 예로 들었다. BOE는 2002년 현대전자(현 SK하이닉스) 계열사였던 하이디스를 인수했다. 핵심인력과 기술을 흡수한 이후 이 회사를 부도처리했다.

김 대표는 LCD를 넘어 태양광전지로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그는 “태양광전지는 차세대 성장전략 분야 가운데 하나”라며 “대만 등 해외시장 진출을 강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지수 기자 onethi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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