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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칼럼] 늦가을 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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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가라고 가랑비, 있으라고 이슬비.’ 참 능청스런 옛말이다. 달갑잖은 손님이 돌아갈 생각을 않아 주인이 “이젠 가라고 가랑비 온다”고 하자 눈치없는 손님이 “더 있으라고 이슬비 온다”며 버텼다는 얘기. 가랑비는 가늘게 조금씩 내리는 비로 세우(細雨)를 뜻하는 우리말이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말처럼 가는비, 잔비를 말한다. 이슬비도 나뭇잎에 이슬이 겨우 맺힐 정도로 가벼운 비다.

‘가을비는 빗자루로도 피한다’고 한다. 여름 장마처럼 많이 오지 않고 곧 그친다는 뜻이다. ‘봄비는 일비, 여름비는 잠비, 가을비는 떡비, 겨울비는 술비’라는 속담도 있다. 봄에는 비가 와도 들일을 해야 하고, 여름에는 비 올 때 낮잠을 즐기고, 가을에는 햅쌀로 떡을 쪄 먹으며 쉬고, 겨울엔 술 마시며 논다는 얘기다.

이처럼 비를 나타내는 우리말 이름은 다양하다. 내리는 모습이나 많고 적음, 주변 환경, 날씨에 따라 100가지가 넘는다. 비를 대하는 느낌까지 곁들였다. 영어 어휘의 보고(寶庫)라는 셰익스피어 낱말사전이 무색할 정도다. 오랜 가뭄 끝에 내려 약으로 쓸 만큼 좋다는 약비, 때맞춰 알맞게 뻗??단비, 모종하기에 좋은 모종비, 모낼 때 오는 목비, 계속 올 것처럼 좍좍 내리다 그치는 웃비….

빗줄기의 굵기에 따라서도 저마다 이름이 다르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안개비부터, 이슬비, 보슬비, 가루비, 실비, 싸락비를 거쳐 억수같이 퍼붓는 장대비, 작달비까지 각양각색이다. 비의 양과 내리는 기간에 따라서는 햇볕 속에 잠깐 오다 그치는 여우비, 갑자기 세차게 쏟아지다가 그치는 소나기, 끈질기게 오래 내리는 궂은비, 하늘에서 쏟아붓듯 하는 큰비, 천둥과 함께 요란하게 오는 우레비(雷雨), 일정 기간 계속해서 많이 오는 장맛비 등으로 불린다.

장맛비도 봄에 드는 봄장마, 초가을에 쏟아지다 반짝 개고 또 내리다 개는 건들장마, 제철 지난 뒤에 오는 늦장마로 구분한다. 장마에 큰물을 낸 뒤 쉬었다가 다시 내려 흙을 부셔내는 개부심, 겨우 먼지 나지 않을 정도로 조금 오는 먼지잼도 재미있는 표현이다. 센바람에 날려 마구 흩뿌려지는 비보라는 한겨울 눈보라와 대응하는 이름이다.

겨울을 재촉하는 한파가 덮쳤다 간 뒤 어제는 하루종일 가는비가 오락가락 내렸다. 가을가뭄에 목마른 들녘이 아직 많으니 꿀비, 단비, 감우(甘雨)가 따로 없다. 두보도 시 ‘춘야희우(春夜喜雨)’에서 호우지시절(好雨知時節)이라 했다.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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