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현장 리포트
자동차 경주의 철인경기…현대차 WRC 참관기
특수 양산차로 고성능 경쟁…랠리카 i20 올해 3위 올라
WRC 대규모 투자…위상 높여
고급차 '제네시스' 출격 채비, 글로벌 명차와 경쟁 '레벨업'
[ 박준동 기자 ]
영국의 늦가을 날씨는 예상보다 혹독했다. 지난 14일 리버풀에서 자동차로 1시간 떨어진 웨일스의 디사이드(Deeside)에선 비가 내려 한기가 서렸다. 월드랠리챔피언십(WRC)의 본부 격인 서비스파크에서 나눠준 비옷은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비옷 속으로 비가 살갗을 파고들었다. 내일 참관하라는 본부의 얘기를 듣고 숙소로 옮겼다.
다음날 아침. 대회의 하이라이트인 19번 스테이지(20㎞가량 되는 랠리 코스)까지 가는 길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도로에서 내려 1㎞를 걸어가야만 했다. 빗줄기는 어제보다 거세졌다. 바람까지 몰아치기 시작했다. 비옷에 우산까지 썼지만 무용지물이었다. 비옷은 대부분 찢어졌다. 입술은 저절로 덜덜 떨렸다. 영상 10도의 기온에도 살을 엔다는 말이 이런 날씨를 말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를 숙이고 30분여를 걸어 겨우 도착했다. 대서양을 타고 온 비에다 북해에서 내려오는 차가운 바람까지…. 몸이 저절로 휘청거렸다.
현대차의 WRC 재도전
WRC는 포뮬러원(F1)과 함께 세계 모터스포츠의 양대산맥이다. F1이 서킷을 도는 경기라면 WRC는 자연이 경기장이다. WRC는 짧은 포장도로 외에는 모두 자갈밭, 빙판길, 활주로, 산악지대, 사막 등에서 치러진다. WRC가 ‘자동차 경주의 철인경기’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이유다. F1 차가 속도를 위해 특수제작된 차량이라면 WRC 랠리카는 양산차를 기반으로 삼는다.
랠리카는 한국에선 이제 막 관심을 모으지만 유럽에선 많은 관중이 몰리는 인기 스포츠다. 기자가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을 때 ‘와’ 하는 함성이 들렸다. 비바람을 가르고 굉음을 내며 지나가는 랠리카에 환호하는 소리였다. 얼추 세어보니 700~800명은 될 듯 싶었다. 19개의 스테이지가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1만5000명의 관중이 비바람 속에 서 있는 것이다.
현대자동차는 2위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합을 벌이고 있었다. 현대차의 출전 차량은 i20 기반의 랠리카. 1600㏄ 엔진을 개조해 터보차저 엔진을 얹었다. 300마력에 6000rpm을 갖춘 고출력 자동차다.
현대차는 2000년에 이미 베르나로 도전장을 내민 적이 있다. 하지만 이렇다 할 성적도 못 내고 투자비 대비 효과가 별로 없다는 판단에 따라 2003년 철수했다. 현대차가 다시 전쟁에 뛰어든 것은 지난해. 출전 2년 만에 선두권을 다투고 있는 것이다.
고급차 도약 위한 발판
현대차는 웨일스 대회가 마지막인 2015 시즌에서 종합 3위를 차지했다. 2위까지 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80~90년 역사의 자동차업체도 선두권에 쉽사리 오르지 못하는 대회다.
현대차는 WRC를 위해 대규모 투자를 했다. 2012년 말 독일 알체나우에 직원 150여명의 현대모터스포츠법인을 세웠다.
고출력을 위한 테크니션도 유럽 현지에서 수십명 고용했다. 연봉만 수백만달러인 드라이버도 2명 채용했다. 랠리카를 만들면서 독일 뉘르부르크링에서 수백 차례의 시험주행을 거치며 섬세한 튜닝을 진행했다. WRC가 열리는 14개국을 빠짐없이 돌았다.
현대차가 이처럼 막대한 투자를 마다하지 않는 것은 고급차와 고성능차를 내놓기 위해서다. 판매량 측면에선 세계 5위까지 올라왔지만 평판은 그만큼 못 미치는 게 사실. 대중차 업체라는 이미지를 극복하고 벤츠 BMW 등 독일 명차와 경쟁하려면 한 단계 레벨업이 절실하다고 판단했다.
랠리카를 준비하면서 쌓이는 노하우는 그대로 제네시스에 전해진다. 제네시스는 현대차가 독립시킨 고급차 브랜다. 도요타가 렉서스를 세운 것과 같은 맥락이다. 고출력을 견뎌내는 차의 밸런스와 안정감이 2년간 차곡차곡 쌓였다. 그 결과 다음달 출시 예정인 제네시스 EQ900(에쿠스 후속모델)은 벤츠와 견줘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제네시스는 이제 시작이다. WRC를 기반으로 고급차를 준비해온 현대차가 큰 성공을 거둘 것이란 예감이 든다.
디사이드(영국)=박준동 기자 jdpow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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