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 문명 재조명하는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20년 북방초원 누비며 깨달은 건 역사 편견·왜곡 걷어내기 시급"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역사학자 꿈
대학·대학원·러시아 유학 '고고학 한우물'
발해사 연구하면서 극동지역 중요성 부각
중국·일본 등 역사해석 패권주의 짙어
지금 필요한 건 '합리적 민족주의자'
논리적 역사 연구·서술 무엇보다 중요
[ 김보영 기자 ] 시베리아는 여름도 춥다. 8월 말에도 아침, 저녁에는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다. 아침에 눈을 뜨면 어김없이 손·발가락이 곱아 있다. 보드카를 한 잔 들이켜야 비로소 몸이 풀린다. 직접 장작을 패고 물을 끓인다. 밥을 차려 먹으면 현장으로 직행이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45)가 거의 매년 유적 탐사를 위해 찾았던 서부 시베리아 발굴 현장의 아침 풍경은 언제나 이랬다.
‘인디아나 존스’ 얘기를 들으면 강 교수는 웃는다. “고고학자의 실제 모습은 존스가 아니라 영화 속에서 총에 맞고 쓰러지는 엑스트라 인부에 더 가깝다”는 것. 그는 20년간 북방 초원지역 연구의 ‘한우물’을 파온 국내에 몇 안 되는 유라시아 초원문화 전문가다. 북방 초원은 헝가리와 남부 러시아에서 시작해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를 거쳐 몽골에 이르는 북반구의 거대한 지역이다. 초원문화의 유적을 찾기 위해 1년에 몇 차례씩 발굴 현장으로 떠나는 그를 지난 5일 자택 인근 서울 반포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오해로 얼룩진 북방 초원문화
세계 4대 문명으로 일컬어지는 메소포타미아, 나일, 인더스, 황허 문명은 정착민의 역사다. 초원에 살았던 이들은 새로운 문물과 기술을 여러 문명에 전달했지만 기록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끊임없이 이동한 유목민이어서다. 그들에겐 궁궐이나 신전, 도시의 흔적이 없다. 초원문화의 상당 부분이 ‘베일’에 가려져 있는 이유다.
그만큼 오해도 많다. 일본은 일제강점기의 한반도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한국문화의 ‘북방기원설’을 주장했다. 이의 반작용으로 최근 국내에서는 한반도에 미친 북방문화의 영향 자체를 부정하는 학자가 늘고 있다. 강 교수는 “북방기원설이 억지 주장이라고 해서 북방과의 교류가 있었다는 흔적까지 부정하는 것은 극단적인 사고”라고 지적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유라시아 초원문화가 ‘야만인’의 문화라는 편견의 뿌리도 깊다. 유목민은 특히 잔인하다는 선입견이 대표적이다. 전장에서 적을 죽였을 때 목을 자르는 다른 지역과 달리 유목민들은 재빨리 이동하기 위해 머리 가죽을 벗겼는데 이를 근거로 잔인하다는 선입견을 가지게 됐다는 것이다. 아나톨리 하자노프의 《유목사회의 구조》나 토머스 바필드의 《위태로운 변경》 등은 유목민들이 정착 국가의 재화를 약탈해 국가를 수립했다고 봤다.
강 교수는 초원문화를 ‘제5의 문명’이라고 불렀다. “유라시아 초원문명은 환상적이지도, 야만적이지도 않습니다. 정착민들에게 ‘빌붙어’ 성립된 문명이 아니라 오히려 문명의 ‘혈관’ 역할을 하며 정착민의 문화를 융성하게 했어요. 세계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던 북방을 제대로 알리는 것이 연구 목표입니다.”
유라시아 초원 연구 ‘한우물’ 20년
강 교수가 북방 초원에 관심을 가진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담임교사의 영향으로 역사에 재미를 붙였다. 중학생 때부터 장래 희망을 ‘역사학자’라고 썼다. 고대사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 “꽤 오래 전에 진로를 정한 셈이죠. 한민족의 역사를 밝히고 싶었어요.”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에 입학해 학부와 대학원을 마쳤다. 석사학위 논문은 중국 동북지방 청동기문화와 관련한 것이다. “요녕지방의 비파형 동검을 다룬 논문이 데뷔작이었어요. 그때부터 유라시아 초원문화를 연구했으니 20년이 다 됐습니다.”
북방 초원 지역을 제대로 ‘파려면’ 러시아 사료 연구는 필수적이다. 냉전의 영향으로 러시아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과 유적 연구는 세계적으로 거의 이뤄지지 못했다. 북방 초원 전문가로 발돋움하기 위한 러시아 유학의 계기는 우연히 왔다. 국내 전시회에 참석하러 한국을 방문했던 러시아과학원 시베리아분소 고고민족학연구소의 뱌체슬라프 몰로딘 교수가 그에게 북방 고고학 연구를 제안했다.
그는 지금도 러시아 유학을 인생 【?가장 잘한 결정으로 꼽는다. 시베리아의 러시아과학원에는 블라디보스토크부터 우랄산맥까지 유라시아의 모든 고고학자가 모였다. 연구 안목이 확 넓어지는 계기가 됐다. “오늘은 카자흐스탄, 내일은 바이칼…. 매주 주옥 같은 발표가 이어졌어요. 러시아 유학은 전문가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된 결정적 계기였죠.”
역사 패권주의 맞서려면 ‘합리적 민족주의자’ 돼야
러시아과학원 시절 ‘연구 내용을 20분 안에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몰로딘 교수의 가르침도 강 교수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몰로딘 교수는 발굴 현장에 구경하러 온 촌부들에게 ‘차 한 잔 마시자’고 불러서 10~20분 동안 유적과 얽힌 이야기를 해줬다. “아무것도 모르는 농부들을 울리고 웃겼죠. 프레젠테이션 파일이 없는 진정한 대중강연이었어요.”
국내에 돌아오자마자 맡은 프로젝트는 발해와 관련한 연구. 그는 “당시 국내에서는 발해를 한국사에 편입시키려는 노력만 이어지고 있었다”고 했다. 그는 발해인과 말갈인이 함께 세운 ‘다민족 국가’ 발해를 통해 극동지역의 중요성을 재조명하려고 했다. 그때 쓴 책이 《춤추는 발해인》. “제목만 보고 ‘발해는 우리땅’ 같은 주장이 담긴 책이라고 아는 분이 많은데 서론도 안 보신 거죠, 하하. 발해 얘기에만 매달리지 말고 역사를 넓게 보자는 메시지를 담았습니다.”
유라시아 초원 역사를 왜곡 없이 들여다보자는 생각은 최근 펴낸 대중역사서인 《유라시아 역사기행》에서도 전개했다. 그가 늘 강조하는 ‘합리적 민족주의’다. 최근 중국과 瞿? 러시아 등 동아시아 각국의 역사 해석에서는 패권주의가 짙게 드러난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중앙아시아 초원의 ‘투바’에서 낚시하며 휴가를 즐기는 모습을 공개했다. 강한 국력을 강조하기 위해 초원의 이미지를 빌린 것이다. 중국은 전 세계 국가 중 유일하게 영토 중심이 아니라 민족 중심의 역사를 서술해 우려를 낳고 있다.
강 교수는 “동아시아 7개 국가의 역사 서술에서 최근 민족주의적 성향이 두드러진다”며 “한국이 이 틈바구니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으려면 논리적으로 역사를 서술하고, 납득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시베리아 지역 청동기와 철기문화 연구, 러시아의 발해와 고구려 연구 성과 소개, 흉노와 중앙아시아 연구에 이르기까지 강 교수의 연구 분야는 유라시아 초원 지역을 종횡무진 누빈다. 평소 학생들에게 “나처럼 연구하지 말라”고 농담처럼 얘기한다는 그는 “역사학의 각 분야는 일생을 바쳐 연구해도 다 할 수 없지만 유라시아 초원처럼 잘 알려지지 않은 분야에는 초창기에 다방면을 연구하는 사람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말했다. “제가 터를 잡으면 그 위에 집을 짓는 연구자도 나타나겠죠.”
고고학자의 세계
고고학자가 가장 많이 하는 일은 '삽질'
역사에 대한 흥미·체력이 '첫째 조건'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는 고고학자의 첫째 조건으로 역사에 대한 ‘흥미’를 든다. 그 다음이 ‘체력’이다. 강 교수는 “직접 ‘삽질’을 해 유물을 파내야 한다”며 “최근에는 환경이 많이 좋아졌지만 현장에서 먹고 자는 등 야외생활에 적응할 각오가 돼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유행하는 ‘캠핑’은 고고학자 사이에서 별로 인기가 없다. “맨날 하는 일인데 왜 여가 시간에도 캠핑을 해야 하느냐”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현장 업무는 고되지만 유물이 삽 끝에 ‘걸릴’ 때의 느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만족감이 크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일반 사학과 안에 ‘고고학 전공’이 있는 학교가 있는가 하면 고고학과, 고고미술사학과처럼 별도 학과를 설립한 학교도 있다.
강 교수는 “통상 석사과정까지 마쳐야 관련 직업을 찾을 수 있고 박사과정을 밟으며 해외에서 경력을 쌓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설명했다. 대학교수를 목표로 공부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설 발굴단이나 국립박물관에서 일하는 고고학자도 많다.
김보영 기자 wing@hankyung.com
[인터뷰] 가치투자의 달인, "휘열" 초보개미 탈출비법 공개
[강연회] 가치투자 '이채원.최준철.이상진' 출연...무료 선착순 접수중 (11.6_여의도 한국거래소)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