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가을을 여행의 계절이라 부른다.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이나 레저용차량(RV)의 넓은 적재 공간에 텐트와 각종 장비를 싣고 떠나는 오토캠핑족을 보는 것도 흔한 일이다.
캠핑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굽기’다. 이글거리는 붉은 숯덩이는 뭐든 굽고 싶어지게 한다. 그런데 어떤 것이든 불에 굽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게 있다. 바로 ‘석쇠’다. 석쇠는 청동기·철기 시대부터 쓰였다고 한다. 쇠를 그물모양으로 엮어 만든 그물을 뜻한다. 영어로는 ‘그릴(grill)’이라 부르는데, 라틴어 ‘크라티큘라(craticula)’에서 유래했다.
이처럼 오래된 그릴이 자동차로 들어온 것은 1900년대 초반이다. 지금이야 자동차회사마다 독특한 라디에이터 그릴로 디자인 매력을 뽐내지만 1903년 냉각에 필요한 공기를 얻기 위해 만들어진 그릴은 대부분 아치 형태로 출발했다. 그리고 아치 형태는 한동안 그릴 디자인의 표준이 될 만큼 유행했다.
그러다 이른바 ‘분할 그릴’이 처음 나온 것은 1923년 등장한 알파로메오 스포츠카로 기록돼 있다. ‘RL’로 알려진 알파로메오 스포츠카는 1921년 주세페 메로시가 디자인했는데, 레이싱 능력을 높이기 위해 분할 그릴을 도입했 鳴?전해진다.
이후 자동차 회사마다 정체성을 드러내는 디자인 수단으로 그릴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특히 1930년대 이후 그릴은 기능성 못지않게 심미성이 중요하게 부각되며 디자이너들이 많은 공을 들였다. 덕분에 그릴은 각 브랜드의 상징으로 떠오르면서 존재감이 부각됐다.
롤스로이스는 수직 대형 그릴을 통해 위엄을 드러내고, BMW는 콩팥 모양을 본뜬 키드니 분할 그릴로 진화했다. 치아 모양을 담은 로버의 그릴, 닷지의 교차형 수평 그릴, 알파로메오의 방패형 6선 그릴, 볼보의 대각선 그릴, 아우디의 싱글 프레임 그릴, 폰티악의 분할 수평 그릴, 포드의 3선 그릴 등 같은 기능을 해도 모양은 천차만별로 진화했다. 그릴 모양에 심혈을 기울이는 이유는 소비자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서다. 크기와 라디에이터 무늬를 결정하는 선의 굵기 및 방향에 따라 다양한 느낌을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때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평가를 받던 국산차도 최근에는 그릴 디자인 차별화에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쉐보레는 듀얼 포트 그릴, 현대차는 헥사고날(6각형) 그릴, 기아차는 호랑이코 그릴로 시선을 끌어들인다.
하지만 구멍 뚫린 그릴의 시대도 오래가지 않을 것 같다. 공기 냉각이 필요 없는 전기차가 속속 등장하고 있어서다. 공기저항을 줄이려면 그릴을 막는 게 더 낫다. 이미 그릴 자리에는 충전 포트가 자리잡고 있다. 냉각을 위한 그릴이 충전을 위한 ‘그릴 아닌 그릴’로 바뀌는 중이다.
권용주 < 오토타임즈 기자 soo4195@autotime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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