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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공부] 100년 만에 완결된 수취 제도 '대동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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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고 최경석 쌤의 '술술 읽히는 한국사' (31)

(29) 1636년 겨울, 남한산성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30) 붕당 정치, 예송 논쟁으로 이어지다
(32) 18세기, 조선의 美 달항아리
(33) 정조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17세기는 한편으로 전쟁의 시대였지만, 또 한편에서는 서서히 상품 경제가 발전하는 이른바 ‘상업의 시대’이기도 합니다. 중국에서는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중국을 차지하는 혼란기였으나 이미 명대에 들어온 고구마, 감자, 옥수수 등 외래 작물의 보급과 양쯔강 중류의 발전으로 상업에서도 활기를 띠었지요. 일본에서는 17세기 초에 에도 막부가 일찍 들어서면서 지역별로 거점 도시가 발전하는 양상을 띠며 조닌이라는 상공업자들의 성장이 두드러집니다.

조선 후기 사회의 활력소, 대동법

조선의 상황은 좀 더 극적입니다. 이미 16세기 말 임진왜란으로 국토가 황폐화됐고 1636년 병자호란으로 백성들의 삶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17세기 후반부터는 반전을 거듭하며 시장과 상업의 물꼬가 트이며 조선 후기 사회가 활력을 되찾게 됩니다. 瀏릿摸?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그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역사학자들이 공통적으로 꼽는 요인은 바로 ‘대동법’입니다.

대동법은 간단히 말하면 기존 공납제를 쌀로 환산해 내는 것입니다. 매우 간단해 보이지만 이 법을 전국적으로 실시하는 데 걸린 시간만 무려 100년입니다. 그리고 이 대동법의 원인이 되는 공납제의 문제점은 이미 16세기부터 드러났고 우여곡절 끝에 대동법이라는 개혁 법안이 탄생하게 됩니다.

사실 조선은 과전법이라는 토지 개혁을 통해 농민을 보호하면서 대신 전세(토지세), 공납(토지세), 역(군역과 요역)이라는 수취 체제를 만들어 톱니바퀴처럼 국가가 안정적으로 돌아가도록 시스템을 잘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점차 양반지주 등이 더 많은 토지를 가지려 하고, 탐관오리들이 공납제를 교묘히 역이용해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 몇 십배의 이득을 취하면서 그 부담을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떠넘겨 시스템에 과부하가 걸리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율곡 이이와 서애 류성룡의 개혁안, 수미법

그중에서도 가장 심했던 것이 공납입니다. 공납은 각 지방의 특산물을 현물로 바치는 것인데, 점차 중앙 정부는 물론 지방 관청에서도 필요한 물건이 늘어나면서 서서히 다수 농민들의 부담이 커지게 됩니다. 또한 농사 짓다 말고 특산물을 구하러 가는 것도 힘든 와중에 자신의 지방에 나지 않는 특산물도 마구 배정되면서 문제가 커집니다. 예를 들면 강원도 산골에 김이나 전복을 구해 오라고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농민은 만사를 제쳐놓고 이를 구하러 가야겠지요. 이 문제를 해결한다고 나타난 것이 방납상인입니다. 이들은 농민 대신 물품을 구해준다고 해놓고선 이미 말단 관리들과 짜고 그 물건값의 몇 십배나 더 올려 받는 방식으로 부당한 이득을 취했습니다. 거꾸로 다수 농민들이 가장 고통스럽게 떠안았던 것이 바로 이 공납이었지요.

공납의 폐단에 대해 이미 율곡 이이가 농민들을 위해 쌀로 거둘 것을 주장했고, 류성룡이 임진왜란 와중에 일부 지역에서 수미법이라고 하여 쌀로 실제 거두었지만 전쟁의 영향으로 제대로 시행하지 못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해결한 것은 광해군 때 영의정 이원익이었습니다. 그는 토지를 기준으로, 쌀로 공납을 대신 내는 방식을 주장합니다. 이렇게 되면 문제가 등장합니다. 그 전까지는 토지 소유와 상관없이 집집마다 부과되던 공납이 토지 소유자에게 집중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토지를 많이 가진 양반 지배층의 반발이 나타나게 됩니다. 오늘날로 치면 부자증세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역시 예나 지금이나 세금 문제는 한 국가의 가장 주요한 정책이자 논쟁거리라고 할 수 있어요. 결국 광해군은 민생 안정과 왕권 강화라는 측면에서 대동법을 시행하되, 양반 지주들의 반대를 고려해 경기도에서만 실시하게 됩니다. 대신 국가와 관청에서 필요한 물품은 별도로 공인이라는 관허상인을 통해 조달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국가 공인 택배업자를 두는 방식이지요. 그럼 기존 방납상인들이 몇 십배나 올려 거둬들이는 폐단을 막을 수 있고 시장은 시장대로 활성화될 수 있었습니다.

대동법 전국적 실시에 결정적 기여를 한 김육

‘대동’이라는 말은 유교 경전 『예기』의 ‘대동 세계’에서 따온 것입니다. 남녀노소 누구나 행복하게 산다는 유교적 이상 사회를 뜻합니다. 그만큼 대동법으로 조선 사회가 안정되기를 바란 것이지요. 그러나 이 대동법에 대한 반발은 토지를 다수 차지하던 집권층 양반부터 기존 공납제로 이득을 보던 말단 관료까지 매우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숙종대에 전국적 실시가 완료될 때까지 무려 100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집권층과 달리 비주류 세력으로 민생 안정에 관심이 많았던 김육은 효종 때에 대동법을 지지하며 전국적 확대를 강하게 주장합니다. 70세 늦은 나이에도 상소를 올려 효종을 설득했고 심지어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대동법이 잘 유지되고 확산되기를 바랐던 이가 김육입니다. 이러한 그의 소신과 주장에 동료 신하들은 심지어 비웃음까지 날렸으나, 김육은 오로지 백성을 위해 대동법을 변호하여 마침내 충청, 전라도의 대동법 시행이라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8세기 숙종대에 황해도까지 실시해 대동법이 마무리됩니다. 이를 통해 다수의 농민 부담이 줄어들었고 반대로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해 공인 등 상인이 성장하고 유통 경제도 발전하며 지방 장시도 활성화됩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며 대동법의 운영상 문제가 나타나고 공납제도 여전히 잔존하면서 다시 농민들이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대동법을 통해 조선 후기 사회는 양란의 상흔을 씻고 다양한 계층과 문화가 발전하게 됩니다.

■ 최경석 선생님

최경석 선생님은 현재 EBS에서 한국사, 동아시아사 강의를 하고 있다. EBS 진학담당위원도 맡고 있다. 현재 대원고 역사교사로 재직 중이다. ‘청소년을 위한 역사란 무엇인가’ ‘생각이 크는 인문학 6-역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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