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희진 기자 ]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위기.
증권업계에서 30년 외길을 걸어온 투자전략가(스트래티지스트)는 최근 글로벌 증시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김한진 KTB투자증권 투자전략팀장(56·사진)은 그동안 쌓은 연륜만큼 증시를 보는 시각도 관대한 편이다. 웬만한 하락장에서는 기자에게 늘 '공포감이 지나치다'고 대꾸하던 그였다.
지난 1일 서울 여의도에서 만난 김 팀장의 반응은 평소와 사뭇 달랐다. 시장 상황이 녹록지 않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의 입에서 '위기'라는 단어가 나온 것은 의외였다. 주시식장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에 변화가 있음을 뜻했다.
"사실 요즘같은 장에서는 업계 경험이나 연륜도 별 도움이 안 됩니다. 지금까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전무후무한 상황이기 때문이죠."
멋쩍게 웃던 그는 2008년 리먼 브러더스 사태로 번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를 떠올리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때보다 더 상황이 나쁘냐'는 기자의 질문에 마른침을 삼키고 조심스레 입을 뗐다. 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의자를 조금 더 당겨 앉았다.
◆세계 경기 동반 회복? 몰락?…열쇠는 '미국 경기'
김 팀장은 여의도 증권가 최고령 스트래티지스트다. 1986년 신영증권 애널리스트(기업분석가)로 입사한 그는 1994년부터 거시경제 전반을 들여다보는 이코노미스트(경제분석가), 스트래티지스트로 활동했다. 이후 증권사 및 자산운용사 리서치센터장부터 피데스투자자문 부사장까지 지낸 그는 2013년 리서치센터의 삶을 찾아 KTB투자증권에 다시 평직원으로 입사했다.
김 팀장은 지난 30년동안 증권업계에서 숱한 대내외 파고와 맞닥뜨렸다. 1990년대 아시아 통화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10년대 유럽재정 위기와 미국 재정절벽 논란 등이 한국 증시를 위협하던 상황을 현장에서 지켜봤다.
"그래도 과거에는 돈을 풀 수 있는 정책 수단이 남아있었죠.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모든 통화 정책을 소진하고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처지입니다."
그는 미국 통화정책의 성적표를 기다리는 현 시점에서 글로벌 경기가 동반 '몰락과 회복' 두 가지 갈림길에 섰다고 봤다.
그의 머릿속 두 가지 시나리오는 간단하다. 미국 경기가 미약하더라도 회복세를 이어간다면 미국 수출 의존도가 높은 중국과 아시아 신흥국 경기를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미국 경기가 기대했던 만큼 올라오지 않고 회복이 지연되면 중국과 신흥국 경기는 지금보다 더 악화될 것이다.
"열쇠를 쥐고 있는 건 미국 경기입니다. 전세계 불황 속에서도 유일하게 기대를 걸 수 있는 곳은 미국이었습니다. 실제 미국 경기 선행지수는 다른 나라와 달리 비교적 꾸준히 개선돼왔고요. 그런데 개선 속도가 기대만큼 나오지 않고 있 ?상황에서 중국 경기 둔화 우려까지 겹치면서 시장의 불안이 커지고 있죠."
기로에 선 글로벌 경기를 지켜보며 국내 증시도 선뜻 방향을 결정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판단이다. 불확실성 확대로 투자심리가 위축된 상황에서 뉴스에 따라 하루 하루 등락이 결정되는 박스권 장세가 이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특히 미국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가 예정된 이달 중순까지는 증시 경계감이 최고조로 오른 가운데 금리 인상 신호에 따라 단기 변동성이 커질 것이라는 분석이다.
"불확실성은 신흥국 증시에 더 불리하게 작용합니다. 앞날이 불분명할 때는 적극적으로 주식을 팔기도 어렵지만 사기는 더 힘들죠. 외국인들의 관망세는 앞으로 더 지속되면서 국내 증시는 연말까지 박스권에 갇혀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연말까지 미국 경기 회복에 대한 강한 신뢰가 나온다면 내년 박스권 탈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달 미국 금리는 어떤 방향으로 결정되든 증시 반응은 좋지 못할 것이라는 의견이다.
금리 인상이 연기될 경우에는 시장은 안도감에 환호하겠지만 미국 경기 부진이라는 연기 배경이 이내 증시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반대로 이달 금리가 인상될 경우 이를 시장이 미국 경기 회복의 신호로 받아들일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봤다. 오히려 미국 중앙은행(Fed)의 성급한 판단에 대한 실망감이 커질 수 있다는 것. 특히 상반기까지 증시는 풍부한 유동성과 저금리 기조를 바탕으로 상승해왔기 때문에 미국 금리 인상이 부담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김 팀장은 12월 금리인상에 표를 던졌다. 최근 2~3개월 사이 미국 경제지표가 경기 회복에 대한 신뢰를 끌어올릴 수준은 아니었다는 이유에서다.
"설령 경기 회복에 대한 신뢰가 커졌다고 해도 최근 중국과 신흥국 경기 상황을 무시하고 덜컥 금리를 올릴 수 있을지는 의문이 듭니다. 그만큼 미국 수출 기업들의 부담이 커졌기 때문이죠. 특히 미국은 현재 경기 침체에 대응할 수 있는 정책이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성급하게 금리를 올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안전자산 '완전선호' 올 수도…"가치주·성장주 둘 다 담아라"
최근 시장의 눈이 쏠려 있는 중국 경기도 미국에 달려있다는 게 김 팀장의 시각이다. 중국 경기는 아직 미국 유럽에 비해 글로벌 경기에 대한 종속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설명이다. 최근 중국이 위안화 절하에 나선 것은 중국 경기 뿐 아니라 글로벌 경기 전체의 침체를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사실 중국 입장에서 위안화 절하라는 최후의 카드를 사용한 건 자존심의 상처입니다. 외국인의 자금 이탈을 부추겨 그동안의 증시 부양책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죠. 만약 미국 경기가 더 빨리 올라와서 중국의 화학 철강 에너지 기업들의 상품을 받아줄 수 있다면 중국의 추가 위안화절하는 없을 것입니다. 결국 중국의 향후 경기를 결정하는 건 현재로서 경기 선행지수가 가장 앞서 있는 미국의 추가 회복 여부일 것입니다."
그가 미국 경기 회복을 강조하는 것은 '최악의 상황'에 대한 우려 때문이기도 하다. 최악은 경기가 침체된 상황에서 달러화 강세가 지속되는 경우를 말했다. 달러화 강세는 유가의 추가 폭락을 부추기게 되고, 이 경우 브라질 러시아 등 원자재 수출국의 국가 부도 가능성도 우려된다는 설명이다. 통상 국제 원자재 값은 달러로 매겨지기 때문에 달러 가치와 원자재 가격은 반대로 움직인다.
"미국 경기가 회복되지 않은 채 지금처럼 달러화 강세 상황이 계속된다면 신흥국 전체가 폭탄을 맞게 될 수도 있습니다. 신흥국 자금 유출 강도가 심해지고 글로벌 금융시장은 안전자산 '완전 선호'로 갈 수도 있죠. 지난달 미국 국채 금리가 2% 아래로 떨어졌을 때 '공포의 예고편'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10년 만기 미국 국채 금리는 지난달 25일 4개월 만에 처음으로 심리적 저항선으로 여겨지던 2% 아래로 떨어졌다. 국채금리 하락은 국채 가격 상승을 의미한다. 증시 폭락으로 안전자산인 국채 수요가 크게 늘어나면서 가격이 급등한 것이다.
김 팀장은 불확실성이 커진 증시에서 가치주와 성장주를 동시에 가져가는 전략을 추천했다. 가치주는 현재 기업가치 대비 저평가돼 있어 가격이 싼 주식인 반면 성장주는 앞으로의 성장성을 감안해 비싼 가격을 주고서라도 살만한 주식을 말한다. 김 팀장은 국내 증시에서 성장주와 가치주의 주가 흐름을 분석한 결과 두 종류 주식의 동행 성향을 발견했다.
"증시 완전 개방전인 1992년~1996년을 제외하면 국내 증시에서 가치주는 대체로 성장주와 동시에 올랐습니다. 성장주가 쉬어야 반드시 가치주가 오르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죠. 통상 성장주가 과열을 보일 즈음 가치주가 서서히 오르기 시작해 성장주가 완전히 꺾이는 시점부터는 본격 상승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
특히 앞으로 성장주에 대한 단독 베팅은 위험성이 크다는 지적이다. 그는 유망 업종 내 모든 종목이 함께 오르던 과거의 성장주 시대는 끝났다고 강조했다. 특히 미국 증시와 연관성이 높은 국내 성장주는 올 연말까지 수익률이 부진할 수 있다고 봤다.
"미국 증시에서 성장주가 많이 포함된 나스닥지수의 주가수익비율(PER)이 30배가 넘습니다. 당분간 숨고르기가 더 필요하다고 봅니다. PER이 낮은 가치주를 저가 매수하고 실적이 뒷받침되는 바이오·중국소비 관련 성장주들을 압축해서 갖고 가는 게 위험을 최대한 덜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증시가 상승세를 탄다면 성장주에서 높은 수익률을 기대할 수 있고, 박스권 장세가 계속된다면 가치주에서 일부 수익을 얻고 때를 기다리면 됩니다."
박희진 한경닷컴 기자 hotimpac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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