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둥이 기업'의 도전과 열정 (1) SPC
허창성 창업주
위기 맞자 제빵에만 집중…글로벌 베이커리기업 도약
일본 기술자까지 데려와 품질 개선…동네 빵집, 삼립식품으로 키워
차남 허영인 회장
온도계 들고 다니며 제빵실 체크…미국·일본·프랑스 등 8개국에 진출
[ 강진규 기자 ] “당장 돈 좀 덜 벌면 어떠냐. 재료를 더 좋은 것으로 쓰자.”
1963년 서울 신대방동에 있는 삼립제과공사 제빵공장에서는 새로 출시할 빵의 원가를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당시 사장인 고(故) 허창성 SPC 창업주가 재료비 5원을 들여 빵을 만들자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당시 소비자가격 10원짜리 빵 한 개의 원가는 2원, 제빵회사가 도매상으로부터 받는 가격은 5원50전이었다. 직원들은 빵 한 개에 50전만 남겨서는 회사가 운영이 안된다고 강력히 반대했다. 하지만 허 창업주는 “품질이 좋은 게 우선”이라며 “소비자를 만족시키면 도매상은 따라오게 돼 있다”고 설득했다.
원가 5원을 들인 고품질 빵에 소비자들은 뜨겁게 반응했다. 도매상들도 앞다퉈 삼립 빵을 비싸게 사갔다. 도매가는 8원까지 올랐다. 허 창업주의 ‘고원가 고품질’ 전략은 삼립이 제빵업계 1위로 올라서는 밑거름이 됐다.
차남인 허영인 SPC 회장도 부친의 철학을 이어갔다. 허 회장은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등 시련이 닥쳤을 때도 한눈팔지 않고 품질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대를 이은 품질 경영은 1945년 황해도 옹진에 문을 연 ‘상미당’이라는 작은 제과점을 하루에 빵 1000만개를 생산하는 글로벌 기업 SPC로 성장시켰다.
●빵집 상미당이 빵공장 삼립식품으로
“학비를 대줄 수 없으니 기술을 배워 자립해라.” 상급학교 입시시험을 준비하던 허 창업주에게 아버지의 선언은 청천벽력처럼 느껴졌다. 허 창업주가 14세가 되던 1930년대 중반 무렵이었다. 낙담한 허 창업주는 며칠간의 고민 끝에 일본인이 운영하던 서양식 제과점을 찾아가 제빵 기술을 배우기로 결정했다. 광복 후 그는 일본인이 떠난 동네에 빵집을 차리고 ‘상미당(賞美堂)’이라고 이름 붙였다. ‘맛있는 것을 주는 집’이라는 뜻이다.
상미당이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은 허 창업주가 황해도에 있던 빵집을 정리하고 1948년 서울 방산시장 부근에 새로 매장을 열면서부터다. 허 창업주는 이곳에서 일반 연탄 대신 가루연탄을 사용하는 무연탄가마를 개발했다. 가루연탄 가격은 당시 일반 연탄보다 90%나 저렴했다. 원가를 절감한 만큼 제품 가격을 내리자 상미당의 빵은 소비자 涌“?큰 인기를 끌었다.
회사 이름을 삼립제과공사로 바꾸고 1963년 서울 신대방동에 공장을 세우면서 기업의 기틀이 갖춰졌다. 이듬해 나온 크림빵은 허 창업주의 품질에 대한 고집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허 창업주는 크림빵을 생산하기 위해 제과 선진국인 일본에 찾아가 제빵 기술자를 초빙했다. 바삭한 빵 사이에 부드러운 크림을 주입하는 기술을 배우기 위해 밤낮으로 노력을 기울였다. 연구 끝에 나온 크림빵은 출시하자마자 큰 인기를 끌었다. 퇴직한 SPC 관계자는 “당시 서울 대방동에 있던 삼립식품 공장에 크림빵을 사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몰려든 사람들이 200m 정도 길게 줄을 선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업종 다각화 ‘삼립’ vs 빵 외길 ‘샤니’
허 창업주는 1988년 경영 일선에서 손을 뗐다. 장남인 허영선 전 회장은 삼립식품 회장으로 취임했고, 차남 허영인 회장은 삼립식품 매출 규모의 10분의 1 수준이던 샤니를 물려받았다.
허 전 회장은 1970년대부터 삼립식품 경영에 참여하며 회사 성장에 일조했다. 하지만 회장 취임 후 시작된 제빵시장의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공장 양산 빵보다 품질이 좋은 고급 빵을 파는 일반 제과점이 전국적으로 늘어나면서 삼립식품의 매출이 감소세에 접어들자 사업 다각화를 꾀한 것이 문제였다. 그가 뛰어든 리조트와 유선방송사업은 부실이 쌓여갔다. 1997년 외환위기 때 자금흐름이 막히자 계열사들의 부실은 고스란히 삼립식품의 몫이 됐다. 그해 5월 삼립식품은 부도 처리됐다.
허영인 회장은 젊은 시절부터 아버지와 닮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1981년 삼립식품 대표를 맡으며 경영 수업을 받던 32세의 허 회장은 취임 7개월 만에 부친인 허 창업주에게 회사를 떠나 유학을 가겠다고 했다. 허 회장은 “기업 경영자는 경영 마인드뿐만 아니라 엔지니어처럼 기술 마인드도 갖춰야 한다”며 미국제빵학교(AIB)에 입학했다. 1년6개월간 그는 밀가루 반죽하는 법은 물론 빵을 굽는 법을 하나하나 배웠다.
유학에서 돌아온 허 회장은 샤니를 맡아 일반 빵과 함께 고품질의 케이크, 화과자류를 생산했다. 다른 사업에 진출하기보다 빵의 품질을 높이는 ‘아버지 방식’을 따른 것이다. 그 결과 샤니는 1996년 삼립식품을 제치고 빵 매출 기준 업계 1위로 올라섰다.
외환위기 무렵 구조조정을 할 때도 ‘빵과 관련 없는 사업을 정리한다’는 원칙을 두고 움직였다. 사무정보서비스를 하던 태인킨코와 태인유통의 ‘로손 편의점’ 사업을 매각했고, 빵공장 일부를 폐쇄해 수익성을 높였다.
위기를 극복한 허 회장은 삼립식품이 부도 처리된 지 5년 만인 2002년 901억원에 삼립식품을 인수했다. 삼립식품과 샤니의 ‘S’, 파리바게뜨의 ‘P’, 그외 계열사(company)의 ‘C’를 한 글자씩 따 SPC그룹을 출범시켰다.
●파리바게뜨 앞세운 ‘제2의 창업’
현재 SPC그룹의 주력은 파리바게뜨다. 파리바게뜨는 미국 유학 시절 프랜차이즈 시스템을 경험한 허 회장이 1988년 시작한 사업이다. 허 회장은 “파리바게뜨는 좋은 빵을 더 많은 사람과 나누기 위해 창업한 것”이라며 “맥 뎨?恙?버거킹처럼 본사의 기술력과 운영 노하우를 따르면 누구나 빵집을 운영할 수 있도록 시스템 마련에 힘을 쏟았다”고 말했다.
강진규 기자 jose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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