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클로 최연소 슈퍼바이저 채윤정 씨
"패스트패션이지만 '명품 서비스'…진상손님도 단골 됐어요"
[ 김선주 기자 ] “1년만 일해보자” 시작
동대문시장서 일하며 쇼핑몰 창업 꿈꿔
낮·밤 뒤바뀐 생활에 넉달만에 포기
유니클로 매장 파트타이머로 입사
실적으로 존재가치 입증
명품브랜드처럼 고객 맞춤 서비스
점포 옮기면 고객들도 따라다녀
7년 만에 슈퍼바이저로 ‘초고속 승진’
세상보는 눈 달라졌어요
점포 6곳 총괄…한 달 교통비만 100만원
“막막해도 겁내지말고 일단 도전하세요”
찰랑거리는 단발머리, 하얀 면셔츠에 감색 면바지, 옅은 화장기의 말간 얼굴….
서울 광화문에 있는 유니클로 한국법인인 에프알엘코리아 본사에서 만난 채윤정 씨(29)는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초년생 인상을 풍겼다. 하지만 소박한 이미지와 달리 그는 글로벌 제조·직매형 의류(SPA)회사 유니클로의 울산·부산 점포 직원 120여명을 휘하에 둔 슈퍼바이저다. 청주·대구동성로·분당점장을 거쳐 스물여덟인 지난해 9월 에프알엘코리아 창사 이래 최연소 슈퍼바이저에 올랐다. 비정규직 파트타이머로 출발한 지 7년 만에 유니클로의 경남권 영업총괄관리자로 고속 승진, 업계에 화제를 몰고 왔다.
디자이너, 쇼핑몰 창업 꿈꿨지만…
채 슈퍼바이저는 온라인쇼핑몰 창업을 꿈꾸던 의류학도였다. 어머니가 서울 수유동 2층 단독주택을 개조해 마련한 자그마한 모피공장에서 뛰어놀며 어릴 때부터 원단을 보는 안목을 키웠다. “엄마가 디자인하고 만든 모피 완제품을 대기업에 납품하는 공장이었어요. 2층에는 가족이 거주하고 1층이 공장이었죠.”
숭의여대 패션디자인과에 진학한 건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꼭 패션디자이너가 되겠다는 생각은 아니었지만 옷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런데 공부하다 보니 옷 만드는 일이 정말 힘들고, 창의성도 별반 뛰어나지 못한 것 같아 디자이너의 꿈은 접었습니다.”
졸업 후 진로를 고민하다 의류·잡화 온라인쇼핑몰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창업 전에 실무를 익힐 요량으로 서울 동대문 의류도매시장의 한 점포에 들어갔다. 스물한 살 때였다. “새벽에 출근해 전국에서 올라온 상인들에게 전표를 작성하고 옷을 건네주는 일이었죠. 배운 게 많았지만 너무 주먹구구식이라 힘들고 회의도 들더군요.”
최저임금 받는 동대문시장 파트타이머로 시작
낮과 밤이 바뀐 탓에 육체적인 한계를 느꼈다. 제일 힘든 건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4개월 만에 동대문 煇걋?마무리하고 2007년 두 번째 직장으로 유니클로 서울 압구정점 파트타이머를 선택했다.
일본 패스트리테일링그룹의 유니클로는 지난해 세계에서 1조3800억엔(약 12조원)의 매출을 올린 SPA업계 글로벌 강자다. 한국에서도 단일 브랜드로 가장 많은 8954억원어치를 팔았다. “대학 때부터 좋아한 브랜드예요. 압구정점을 연다길래 ‘1년 정도 일해 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했어요.”
2004년 한국에 진출한 유니클로는 당시 낯선 브랜드였다. SPA가 지금처럼 연 4조원대 시장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예상은 누구도 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게스 리바이스 등 선명한 로고를 드러내는 미국 브랜드들이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최저임금을 간신히 넘긴 임금을 받는 비정규직 파트타이머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거의 온종일 서서 일해 다리가 퉁퉁 붓기 일쑤였다. 청담동 명품거리 초입의 점포여서인지 소비자 취향도 까다로웠다. SPA 매장은 소비자가 스스로 옷을 고르는 방식인데도, 직원을 한 시간 넘게 끌고다니며 서비스를 원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차 트렁크까지 쇼핑백을 옮겨달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싫지 않았어요. 의견이 다르다고 고객과 실랑이를 벌이기보다 한 명이라도 더 만족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맞춤 서비스로 ‘진상손님’도 단골로 확보
압구정점에서 3년을 일하며 채 슈퍼바이저는 인근 매장 해외 명품브랜드들의 남다른 프라이빗 쇼핑서비스를 유심히 관찰했다. 과도한 서비스를 요구하는 ‘진상손님’일지라도 외면하지 않고, 개인 맞춤형 서비스를 체화하는 기회로 활용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러자 어느 순간 매출이 늘기 시작했다. “먼저 이해하려고 마음먹으니 고객들도 저와의 대화를 재미있어하더군요. ‘쌀쌀맞다’고 생각했던 한 고객이 어느날 ‘고아원에 후원할 옷’이라며 몇백만원어치를 사가는 걸 보고는 편견을 가졌던 나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점포 이동과 무관하게 그를 따라다니는 단골도 여럿 생겼다. “울산·부산 슈퍼바이저가 되자 한 서울 고객이 KTX를 타고 울산으로 내려와 쇼핑하더군요. 천천히 대화하면서 쇼핑하는 게 즐겁다면서요.” 숍마스터(매장관리인)가 단골을 몰고다니는 명품업계의 일이 SPA업계에서 나타난 것이다.
실적으로 존재가치를 입증하자 승진이 뒤따랐다. 비정규직 파트타이머로 입사한 지 3년 만인 2010년 정규직 사원이 됐다. 이듬해 4월과 7월에는 각각 코엑스점 부점장, 테크노마트강변점 점장에 올랐다. 이어 청주점·대구동성로점·분당점 점장을 거쳐 28세 때인 지난해 9월 국내 최연소 슈퍼바이저로 임명되며 숨 가쁜 고속 승진 기록을 세웠다.
“막막해도 겁먹지 말고 일단 도전해야”
슈퍼바이저는 일정 권역을 관리·감독하는 중간간부다. 유니클로는 전국 영업점을 몇 개의 권역으로 나눠 관리한다. 채 슈퍼바이저는 울산(4개) 부산(2개) 등 영남권 점포 6곳을 책임지고 있다.
여러 매장의 재고·점포·인사 관리 등을 총괄해야 하다 보니 카카오톡 단톡방(단체채팅방) 8개가 쉴 새 없이 가동된다. “운전을 하면 답이 늦어질 것이란 생각에 자동차도 안 샀어요. 고속버스 택시로 울산·부산권을 이동하느라 한 달 교통비만 100만원 넘게 나옵니다.”
그의 다음 목표는 팀장이다. 슈퍼바이저보다 더 넓은 권역을 관리·감독하는 팀장은 회사에 세 명뿐이다.
젊은 나이에 관리자 역할을 맡은 뒤 세상을 보는 눈이 동년배와 좀 달라졌다는 게 채 슈퍼바이저의 말이다. “요새는 친구들과 대화하다 보면 ‘왜 저렇게 아이처럼 생각할까’라는 아쉬움이 들 때가 적지 않아요.”
도전정신도 강조했다. “뭘 어떻게 할지 막막하더라도 겁내지 말고 일단 도전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진상손님으로부터도 배울 점이 있는 것처럼 어떤 경우에도 보람은 분명히 있으니까요.”
■ 유니클로의 인재경영
학력·근속연수 상관없이 실력으로만 승진
유니클로는 학력 성별 근속연수 등에 상관없이 오로지 실력으로 직원의 성과를 평가하는 완전 실력주의를 추구한다. 채윤정 슈퍼바이저가 서른도 되기 전에 초고속 승진을 거듭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철학 덕분이다.
유니클로는 ‘대졸 신입사원 공채’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대신 ‘유니클로 매니저 캔디데이트(UMC)’라 부르는 점장후보자를 연 1회 선발한다. 고졸이나 장애인도 응시할 수 있다.
서류전형 직무적성검사 면접 인턴십 최종심사 등의 과정을 거쳐 뽑는다. 선발전형의 핵심은 현장에서 5주 동안 근무하는 UMC 인턴십트레이닝이다. 매장에서 고객을 상대하는 태도, 서비스 정신 등을 살피는 절차다.
승진 기회는 연 2회 주어진다. 인사팀은 6개월마다 직원별 커리어, 성과 등을 점검한다. 실적이 좋으면 채 슈퍼바이저처럼 부점장이 된 지 3개월 만에 점장으로 승급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는 사원 부점장 점장을 착실하게 거쳐야 슈퍼바이저로 승진한다.
조은정 에프알엘코리아 인사팀장은 “유니클로는 직원이 성장하는 것을 기다려주는 회사”라며 “국적 학력 연령 성별을 따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선주 기자 sak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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