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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칼럼] '미끄러운 경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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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


‘모든 크레타 사람들은 거짓말쟁이다!’라고 어느 크레타 사람이 외쳤다. 이 말이 참말이라면 그는 거짓말을 한 것이 된다. 반대로 이 말이 거짓이라면 그 자체로 그의 말은 거짓이다. 논리적으로는 성립이 안 되는 상황이다. 유명한 ‘거짓말쟁이의 역설(Liar’s Paradox)’이다. 카드의 한 면에 ‘뒷면의 얘기는 참이다’라고, 반대쪽엔 ‘뒷면의 얘기는 거짓이다’라고 쓰인 경우도 비슷하다. ‘러셀의 역설’이라고 부른다. ‘글을 못 읽는 사람은 아래 전화번호로 연락주세요’라는 광고의 모순도 같다.

모두 논리학 입문 과정에 나오는 사례들이다. ‘일반논리학’이란 대학강의도 대개 이런 얘기로 시작한다. 고대 소피스트들의 궤변에서부터 근대 유럽의 철학자들까지 다양한 명제와 가설, 공리와 정리가 언급된다. 실상은 뻔한 얘기들이기도 하다. 동일률(A는 A다), 모순율(A는 A이면서 동시에 B가 될 수 없다), 배중률(A는 A이거나 A 아니거나 둘 중 하나일 뿐, 그 중간은 없다) 등이 만들어 내는 논리의 세계다. 3단논법은 그렇게 연역법과 귀납법으로 발전했다. 이런 일반논리학 강좌의 사례분석에 매료됐다가 다음 학기 ‘기호논리학’에선 된통 낭패당한 30여년 전 기억이 새롭다. 기호들로 다양한 가정과 순수명제들의 논리적 적합성만 따지는 기호논리학은 실상 고등수학이었다.

‘미끄러운 경사면’도 논리학 교과서에서 언급되는 비유다. 인과관계의 설정에서 빚어질 수 있는 오류, 특히 원인과 결과 사이의 거리가 너무 먼 경우에 적용된다. 엊그제 대한상공회의소가 대정부 경제정책 과제 제언문을 발표하면서 이 표현을 썼다. ‘최근 한국 경제는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미끄러운 경사면(slippery slope)에 서 있다….’ 일단 시작되면 중단이 어렵고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는 상황을 그렇게 묘사한 것이다. 같은 날 한국은행 총재의 평이한 경제동향 브리핑보다 언론에서 더 주목받은 표현이기도 했다. 위기에 대한 경고로는 그만큼 실감이 났다.

미끄러운 경사면은 도미노 이론과도 비유된다. 하지만 논리학의 틀 안에서는 이 비유가 오류의 사례(fallacy of slipprey slope)이기도 하다. 논리적 비약을 강조할 때 미끄러운 경사면의 논변이라는 점을 지적하게 된다. 수많은 오류 유형 중 하나다.

오류론에서 따오긴 했지만 우리 경제가 처한 실상만큼은 제대로 표현했다. 한국에서 가장 미끄러운 급경사면은 어디일까. 무한복지 정책일까, 입법만능의 국회일까. 경제는 가파르게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다.

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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