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유통商 봐주자는 MRO 규제
외국계 배불리고 산업생태계 왜곡
납품 제조업체 경쟁력도 감안해야"
한동 < 경희대 교수·경영학 >
지난 2월 동반성장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결정하지 못한 ‘기업 소모성자재 구매대행(MRO) 가이드라인’의 연장여부가 이달 말께 확정될 것이란 보도다. 중소MRO 유통상을 보호한다면서 동반위가 2011년 시행한 MRO 가이드라인은 대기업 MRO업체의 영업활동을 제한하는 게 골자다. 대기업 MRO업체는 매출 3000억원 이상 기업을 대상으로만 영업할 수 있고, 나머지 매출 3000억원 이하 기업은 중소MRO 유통상을 통해서 납품받도록 한 것이다.
3년 기한의 MRO 가이드라인은 지난해 11월 종료됐으나 연장여부 협의 중 외국계 MRO 대기업의 국내시장 진출 위협, 규제의 실효성 논란이 일면서 협의시한을 이달 말까지 연장해 논의하고 있다. 그런데 업계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 논의과정에서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MRO산업 생태계에서 유통상들의 ‘밥그릇 싸움’에 애꿎은 제조기업만 피해를 보고 있다는 것이다. 제조기업이 경영상 필요에 따라 소모성 자재를 납품받을 유통업체를 선택하는 것이 정상인데, 이것이 근본적으로 제한돼 기업의 경쟁력까지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국내 MRO사업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해야 했던 기업들의 구매원가 절감 및 구매방식 혁신 과정에서 탄생했다. 이처럼 제조기업의 생존과 경쟁력 강화 필요에 따라 생겨난 MRO사업이 ‘가이드라인 규제’ 탓에 되레 중소 제조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주범으로 몰리는 불합리한 결과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연 매출 3000억원이 안 되는 중소·중견기업은 매출이 적다는 이유만으로 물건을 공급해줄 업체를 선택할 권리를 박탈당한 셈이다. 이들 기업은 MRO용품을 중소유통상을 통해서만 사들여야 한다. 연간 2000만원의 저소득 소비자는 온라인 쇼핑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고 오프라인 매장만 이용하라는 것과 같은 터무니없는 논리다.
더 큰 문제는 그동안 MRO 플랫폼을 통해 물품을 생산·공급하며 성장하던 제조기업이 어려워졌다는 점이다. 보통 하나의 MRO 대기업 전자상거래 플랫폼에는 평균 5만~10만여개의 중소 제조기업이 온라인상으로 상품을 공급·거래한다. 국내 MRO기업과 비즈니스 형태가 같은 기업 간(B2B) 전자상거래 기업인 알리바바닷컴의 플랫폼에서도 280만개의 중국 제조기업이 거래하고 있다. 중국 제조기업은 알리바바의 전자상거래 플랫폼이란 ‘파이프라인’을 타고 판로를 확장하며 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B2B플랫폼 비즈니스 MRO산업은 규제에 갇혔고, 결국 지난 3년간 MRO기업들이 플랫폼사업을 포기하거나 매출이 급감하면서 이를 통해 거래하는 중소 제조기업의 매출도 동반 하락하고 있다. MRO 가이드라인의 취지대로 대기업 MRO업체들 ?직접적인 피해를 봤지만 그 피해의 파장이 중소·중견 제조기업에 몰아치는 것이다. 이는 MRO 가이드라인이 이해당사자인 제조기업은 도외시한 채 중간 유통상들의 나눠먹기식 밥그릇 챙기기만 보호하기 때문이다.
전 세계 국가와 기업은 전자상거래 플랫폼 육성에 사활을 걸고 있다. 미래지향적 관점에서 한국 제조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정부 지원책이 절실하다. 제조기업의 가격경쟁력 확보에 필요한 MRO업체 선택권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소비자는 물론 기업을 위해서도 필요로 하는 상품 및 서비스의 선택권은 보호돼야 한다. 유통상의 규모가 작다는 이유로 보호해야 할 이유는 없다. 기업의 크기를 기준으로 산업생태계 작동을 규제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제조·유통기업이 모두 이기는 상생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한동 < 경희대 교수·경영학 >
[한경+ 구독신청] [기사구매] [모바일앱] ⓒ '성공을 부르는 습관' 한국경제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