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출신이면 다 펠레?
사내축구대회 때마다 헛발질…"그럼 넌 태권도 잘해?"
국내 외국인 150만 시대…마이클 과장·스미스 대리의 좌충우돌 직장적응기
회의 때 영어로 또박또박 반박…"마라톤 회의문화 사라졌어요"
부하에 막말하는 인도인 부서장, 알고보니 카스트 상위계급 헉~
[ 박상익 기자 ]
2003년부터 2012년까지 국내 한 대기업에 근무했던 프랑스인 에릭 쉬르데주는 지난 3월 프랑스에서 ‘그들은 미쳤다. 한국인들!’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그는 이 책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조직의 지시, 강도 높은 야근과 회식문화 등 한국의 기업문화를 견디기 힘들었다”고 술회했다.
지난해 국내 거주 외국인은 156만9000명으로, 전년보다 8.6% 증가했다. 한국 전체 인구 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1%로 3%를 넘어섰다. 국내 기업에 취업하는 외국인도 늘어나고 있다.
요즘 한국 기업에 입사하는 외국인들이 모두 쉬르데주처럼 불만 가득한 것은 아니다. 입사 초기 어려움을 겪더라도 문화적 차이를 받아들이고 빠르게 적응하는 신세대가 많다. 때때로 한국 직원들은 상상하지도 못할 태도로 주변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조직원이 생각해보지 못한 새로운 사고의 틀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해하거나, 미워하거나…
한 의료기기 제조업체 수출 담당부서에서 근무하는 알리(32)는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이다. 독실한 이슬람교도인 그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동료들은 입사 후 첫 회식장소를 삼겹살집으로 잡았다가 고기를 한 점도 먹지 않고 음료수만 들이켜는 알리를 보고 “‘아차’ 했다”고 한다.
이후 이 부서에서 부원 전체가 참여하는 회식은 삼겹살집에서 하지 않는다. “이참에 회식문화를 바꿔보자”는 부서장 지시에 따라 서울 시내 유명 ‘맛집’을 돌며 술은 간단히 한두 잔만 하는 식으로 바뀌었다. 동료들은 알리를 위해 그가 회사 안에서 기도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마련해주기도 했다.
동료들의 배려 덕분에 알리는 자신의 고향인 사우디를 비롯한 여러 중동 국가에 회사 제품을 수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알리에게 어려운 계약을 따낸 비결을 물으니 ‘안 되면 되게 하라’는 한국의 격언을 좌우명으로 삼고 노력했다고 하더군요. 한국 사람 다 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근 30대 후반의 인도인을 부서장으로 영입한 한 기업의 정보기술(IT) 관련 부서는 요즘 분위기가 최악이다. 이 부서장의 권위주의적인 태도 때문이다. 이 부서장은 신분제(카스트)가 살아있는 인도 명문가 출신이다. 부서원들의 보고를 별다른 이유 없이 퇴짜를 놓기도 하고, 공식 회의 자리에서 “나는 너희와 신분이 다르다”는 말을 수차례 하는 바람에 부하 직원들이 등을 돌렸다.
사내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노동조합에서도 문제로 삼을 움직임을 보였다. IT 선진국인 인도 출신이라고 해서 별다른 평판 조회 없이 이 부서장을 영입한 회사 측은 부서장과 부서원 간 갈등이 경쟁력 제고에 악영향을 미칠 수준이라고 판단하고 계약을 해지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회사 문화 바꾸는 외국인들
국내 한 대기업 직원인 김 대리(34)는 입사 후 5년이 지나도록 회사 회의문화에 적응하지 못했다. 이 회사는 ‘마라톤 회의’로 악명이 높다. 한창 업무에 집중할 만하면 ‘회의실 집합 명령’이 떨어진다. 들어가면 한두 시간은 기본이다. 보수적인 기업문화로 자유로운 의견 개진은 꿈도 꾸지 못한다. “자유롭게 얘기하자”며 시작한 회의가 그룹장이나 팀장의 훈시로 끝나기 일쑤다.
변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회의문화를 바꾼 것은 새로 들어온 미국인 직원 조너선(35)이었다. 한국 생활 6년차라는 조너선은 몇 달 전 특별 채용으로 회사에 들어왔다. 한국어에도 능숙하다.
조너선은 입사 후 첫 회의 때부터 팀장과 그룹장의 의견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하고 싶은 얘기는 적극적으로 했다. 회사 생활을 시작한 이후 한 번도 겪지 못한 상황을 겪은 팀장과 그룹장은 크게 당황했다.
민망한 상황이 이어지자 회의 횟수는 자연스레 적어졌다. 조너선을 의식해서인지 회의에선 필요한 이야기만 나오고, 시간도 짧아졌다. 절대 고칠 수 없을 것 같았던 회의문화가 바뀌는 것을 본 김 대리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조너선이 영어로 욕설하는 것을 듣고서 ?그룹장이 ‘미국 스타일이니 괜찮다’고 얘기하는 것을 보고는 어이가 없었다”는 게 김 대리의 얘기다.
한 중견그룹 계열사에 다니는 유 과장(36)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외국인 신입사원 때문에 가슴을 쓸어내릴 때가 많다. 미국 대학을 졸업한 프랑스인 다니엘은 특유의 밝은 성격과 친화력 덕에 젊은 직원에게 인기가 많다. 문제는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선배나 임원들에게도 격의가 없다는 것.
얼마 전 유 과장은 그와 복도를 걷다 사장과 마주쳤다. 90도 가까이 인사를 한 유 과장과 달리 다니엘은 “헤이 보스!”라면서 악수를 청했다. 그 모습을 본 유 과장은 ‘저래도 괜찮나’ 싶어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다행히 사장은 “허허” 웃으면서 손을 맞잡았다. 유 과장은 “신입사원이라고 주눅 들지 않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는 모습에 젊은 직원들도 많은 자극을 받은 분위기”라고 말했다.
축구로 다지는 친목
스포츠는 국내 직원들이 외국인 직원과 쉽게 친해질 수 있도록 해주는 매개체다. 한국에 들어와 있는 외국계 기업 최고경영자(CEO) 가운데에는 서울의 산에 매료돼 직원들과 수시로 등산모임을 하는 사람이 많다. 스포츠를 통해 생기는 외국인 직원과의 에피소드도 다양하다.
자동차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는 이 대리(35)는 최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왔다는 인턴 사원을 지도하게 됐다. 22세의 빅토르는 브라질 명문대 공대를 졸업했으며 영어, 포르투갈어, 프랑스어 등 3개 국어를 구사한다.
그는 브라질 축구선수 호나우지뉴를 닮은 얼굴 덕분에 관심을 끌었다. 마침 그가 인턴을 하는 기간에 사내 팀별 축구 대회가 열렸다. 팀장 사이에서 빅토르를 자기 팀에 데려오려는 눈치 싸움까지 펼쳐졌다. ‘브라질 출신이니 축구를 잘하지 않겠느냐’는 기대 때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이 대리의 팀에 들어온 빅토르는 축구 경기를 시작하자마자 많은 사람을 웃게 했다. 공만 왔다 하면 연거푸 헛발질에 넘어지기까지…. ‘몸개그’가 따로 없었다. 알고보니 빅토르는 축구보다 책 읽기를 좋아했던 문학소년이었다. “대항전에서 참패했지만 열심히 뛰는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했어요. 하긴 한국 사람이라고 모두 태권도를 잘하는 건 아니니까요.”
■ 특별취재팀=송종현 산업부 차장(팀장) 이호기(IT과학부) 강현우(산업부) 오동혁(증권부) 박한신(금융부) 김대훈(정치부) 김인선(지식사회부) 박상익(문화스포츠부) 강진규(생활경제부) 홍선표(건설부동산부) 이현동(중소기업부) 기자
박상익 기자 dir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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