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나지막한 구릉과 넓은 하늘, 그 아래로 바다가 숨어있는 듯 주변은 바닷물의 반사로 눈이 부실 것만 같다. 길은 화산재 때문인지 바랜 듯 하얗고 나무 또한 일부러 그런 것처럼 연녹색이다. 영락없는 조선(朝鮮)의 산하다.’
일본 국민작가 시바 료타로 소설 고향을 어찌 잊으랴에 나오는 대목이다. 이곳은 규슈 남쪽 가고시마의 미야마(美山) 마을. 400여년 전 정유재란 때 조선 도공들의 정착지다. 작가는 그 후예 심수관(沈壽官)을 만난 뒤 “심수관 도자기는 두 개의 심장을 갖고 있는데, 하나는 일본 최고 도예가의 치열한 예술혼이고 다른 하나는 바다 건너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가고시마에는 심수관의 ‘두 심장’뿐만 아니라 당시 함께 왔던 도공 박평의 드라마도 녹아 있다. 박평의 12대 후손 박수승은 도고(東鄕)라는 성(姓)을 사 귀화했다. 아들 박무덕은 도고 시게노리라는 이름으로 외교관이 됐고, 두 번이나 외무상을 지내며 군부 강경파에 맞서 태평양전쟁 종결을 이끌었다. 결국 역사의 회오리 속에서 전범이 된 그는 옥사했지만, 지금도 도고 가문은 일본 외교 명문가로 손꼽히고 있다.
서로 다른 길을 걸은 도공의 후예처럼 가고시마 사람들도 수많은 역사의 명암 속에서 부침을 겪었다. 옛날 오스미국과 사쓰마국, 류큐제도 북부를 아우르던 이곳은 일본 최초의 기독교 전래지이자 유럽 기계문명을 도입한 항구이며 일본 근대 공업화의 발상지다. 흑돼지 가쓰오부시 장어 등의 특산물까지 갖췄다.
인물은 ‘메이지 유신 3걸’로 꼽히는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해군 제독 도고 헤이하치로 등이 유명하다. 톰 크루즈 주연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의 모델이 사이고 다카모리다. 온천이 2730여개로 오이타현에 이어 일본 2위다. 관광객도 연 1000만명에 육박한다.
그러나 여름에서 가을은 태풍 때문에 곤혹스럽다. 태풍 상륙 횟수 1위다. 활화산도 많다. 1914년 사쿠라지마 대분화 이후 늘 긴장상태다. 올해도 570차례 이상 연기가 솟더니 어제는 인근 섬의 구치노에라부지마 화산이 폭발했다. 검은 연기가 9㎞ 상공까지 치솟고 화산재가 섬을 뒤덮는 바람에 주민들이 긴급대피했다.
작가 시바 료타로가 심수관 마을을 찾아간 게 1967년이었으니 반세기 전이다. 그때도 화산재가 길을 ‘바랜 듯 하얗게’ 덮었다니, 황망히 대피했던 주민들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길 기원하는 마음이 더 각별하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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