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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과 맛있는 만남] 성세환 BNK금융 회장 겸 부산은행장 "조금 어려워도 같이 가는게 낫다"…경남은행 인수 때 전직원 끌어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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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갈치시장의 비린내 나는 돈이 '36년 금융맨' 키운 밑거름

결단과 타이밍의 귀재
외환위기 때 부산은행도 위태…부실 자회사 부산리스 정리
직원 반발 1년간 온몸으로 막아…회사 고비 때마다 구원투수로

지역경제 든든한 버팀목
엔화 대출 기업 줄도산 위기때 7~8년 자금 대주며 회생 기다려
웬만한 지역 기업들 사정 꿰뚫어…끈끈한 애정과 신뢰가 상생 비결



[ 박한신/이태명 기자 ] 부산 남포동 자갈치시장은 매일 북새통이다. 시설이 현대화되긴 했지만 생선을 손질하고 판매하는 시장 상인들로 넘쳐난다.

1979년 자갈치시장 내 부산은행 충무동지점에 27세 신출내기 은행원이 첫 출근을 했다. 그는 매일 지점 창구에서 ‘자갈치 아지매’들이 생선을 팔아 모은 돈을 수기(手記)로 입금하는 일을 했다. 36년이 흐른 지금 그 청년은 BNK금융그룹 회장 겸 부산은행장이 됐다. 성세환 BNK금융그룹 회장이다.

36년 전 추억이 깃들어서일까. 성 회장은 자갈치시장으로 안내했다. 그는 시장 한쪽 허름한 3층 건물에 ‘부산명물횟집’이란 간판을 ?식당으로 성큼 들어갔다. 1946년 문을 연 이후 69년간 이사 한 번 하지 않고 지금 자리를 지켜온 맛집이다. 36년간 부산은행에 몸담은 성 회장과 묘하게 닮았다. 33년째 단골이라는 성 회장은 “부산에 오면 이 집을 꼭 한 번 와야 한다”고 했다. ‘행원 성세환’에서 ‘회장 성세환’이 되기까지, 성 회장의 이야기를 바다내음 가득한 자갈치시장 부산명물횟집에서 들어봤다.

상사맨을 꿈꾸다 은행원으로

성 회장은 경북 청도 출신이다. 부산에 정착한 건 11세 때부터다. 일제강점기 시절 오사카에서 10년가량 홀로 일하다 귀국한 부친은 ‘농사 지어서는 5남매를 키우기가 버겁다’며 성 회장이 초등학교 4학년 때인 1963년 부산으로 이사했다. 이후 성 회장은 한번도 부산을 떠난 적이 없다. 대학(동아대) 졸업을 앞뒀을 때 그는 취업 때문에 처음으로 부산을 떠날 생각을 했다. 당시 그는 ‘상사맨’을 꿈꿨다. “대학교 4학년 때인 1978년엔 중동 특수가 한창이었어요. 삼성그룹 시험을 봐도 무조건 삼성물산 근무를 1순위로 희망하던 때였죠. 그때 은행에는 다들 안 가려고 했어요. ‘구닥다리’라는 이미지가 강해서였지요.”

그랬던 그가 부산은행을 선택한 건 애향심 때문이었다. 막상 부산을 떠나려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성 회장은 “밤새 고민하다 시험이나 한번 보자는 생각으로 부산은행에 지원했다”며 “막상 붙고 나니 다른 데 못 가겠더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상사맨의 꿈을 접고 시작한 은행원 생활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나름 적성에도 맞았다. 예금하러 오는 아줌마, 돈 빌려달라고 찾아오는 기업체 사장 등을 만나며 세상 돌아가는 일에서 흥미를 느꼈다. 성 회장은 “사람들이 힘들고 어려울 때 은행이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걸 지켜보면서 은행원도 상사맨 못지않게 괜찮은 직업이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자갈치시장에서 배운 은행업의 본질

성 회장이 부산 사투리로 맛깔나게 옛 얘기를 풀어내던 중에 드디어 주문한 회가 나왔다. 주 메뉴인 광어와 참돔. 활어와 선어의 중간쯤 되는 맛이 이 집 회의 특징이다. 달짝지근한 초고추장에 회를 찍어 입에 넣으며 성 회장이 다시 옛 이야기를 이어갔다.

성 회장은 자갈치시장 인근에 있는 충무동 지점에서 은행원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나이 27세 때다. 성 회장은 “자갈치 아지매(아주머니)들이 내게 금융이 뭔지를 가르쳐준 분들”이라고 말했다.

그가 전한 사연은 이렇다. 당시 충무동 지점엔 하루에도 수십번씩 자갈치시장 아주머니들이 생선 팔아 번 돈을 입금하러 들렀다. 고무줄로 대충 묶은 돈뭉치에선 생선비늘이 뚝뚝 떨어졌다. 하루는 비린내가 너무 심해 성 회장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걸 본 아주머니는 “총각, 냄새가 많이 나서 미안하데이. 비늘을 턴다고 털었는데 우짜노. 내일은 정리 잘해서 올게”라고 도리어 사과했다.

성 회장은 그 말을 듣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한다. “아주머니가 화를 내도 할 말이 없는데, 오히려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은행원의 기본이 무엇인지를 뼈저리게 고민하게 됐다”고 털어놨다. ‘은행원 성세환’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된 값진 경험이었다는 얘기다.

부산은행 운명이 걸린 구조조정

충무동 지점을 시작으로 성 회장은 승승장구했다. 지점 영업 1등을 밥 먹듯이 했고 본점에서도 기획조사부(지금의 전략기획부)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하지만 ‘이력에 굴곡이 없어 보인다’는 말에 성 회장은 “왜 없었겠느냐”고 답했다.

그가 꼽은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은행 퇴출이 한창이던 1997~1998년이었다. 당시 국제통화기금(IMF)은 한국 정부에 외환위기 극복 방안으로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 8% 이하 은행을 퇴출시켜 다른 우량은행에 합병시킬 것을 주문했다. 은행들은 말 그대로 난리가 났다. 부산은행도 마찬가지였다. 자체평가 결과 BIS 비율은 7%대로 문을 닫아야 할 위기였다. 부실자산을 처리하는 것 외에는 회생할 길이 없었다.

1997년 본점 기획조사부 차장이던 성 회장은 부산리스라는 자회사 관리팀으로 가라는 인사통보를 받았다. 부산리스는 당시 단기로 외화자금을 빌려 장기 대출을 해준 탓에 부실이 심각했다.

“갑자기 부산리스를 관리하러 가라는 겁니다. 당시 이 회사 자산 2조5000억원 대부분이 부실 자산이었어요. 은행 전체 자산이 10조원 약간 넘던 때이니, 부산리스를 합하면 BIS 비율이 8% 아래로 떨어지는 건 불을 보듯 뻔했죠. 은행을 살리려면 무조건 부산리스를 떼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구조조정 과정은 지난했다. 정리해고가 필수적인 상황에서 부산리스 직원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 부산리스 직원들은 “회사 살리러 온 줄 알았더니 우리를 죽이러 왔다”며 성 회장에게 달려들었다. 그러기를 꼬박 1년여. 성 회장은 부산리스를 파산시켰고 부산은행은 퇴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성 회장은 “그때 손에 피를 너무 많이 묻혀서 지금도 경영자로서 가장 피하고 싶은 게 구조조정”이라며 “조금 어렵더라도 같이 가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했다. 소주 한 잔을 들이켜는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삶의 터전 지키는 게 금융의 역할”

접시 위의 회가 바닥을 드러낼 즈음 담백한 도미지리국이 나왔다. 도미 머리와 뼈를 푹 끓여내서인지 국물이 맑았다. 한 숟가락 떠보니 비린내가 전혀 없는 진국이다. 부산명물횟집엔 다른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밑반찬(스키다시)이 없다. 야채와 밥반찬 몇 가지에 도미지리국이 전부다. 성 회장은 화려한 치장 대신 솔직함으로 승부하는 것 같아 좋다고 했다.

성 회장이 평범한 은행원에서 회장까지 오를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 주변 사람은 그의 진솔함과 신뢰성을 꼽는다.

지난해 경남은행을 인수할 때의 일이다. 맨 처음 경남은행 노동조합은 부산은행에 합병되는 데 강력 반발했다. 합병 이후 구조조정이 뒤따를 것이란 우려에서다. 그런 노조에 성 회장은 “걱정하지 말라. 절대 구조조정은 없다”고 약속했다. ‘어떻게 믿느냐’는 말에 성 회장은 “꼭 도장을 찍어야만 약속이냐, 말로 한 약속이 더 중요하다”고 거듭 설득했다. 반신반의하던 노조도 합병 이후 성 회장이 약속을 지키자 지금은 ‘열성 팬’이 됐다.

2000년대 초 부산지역엔 엔화 대출을 받은 기업들이 많았다. 그런데 많은 기업이 환율이 두 배 가까이 올라 줄도산 위기에 몰렸다. 반도건설도 그중 한 곳이었다. 당시 일선 지점장이던 성 회장은 도산 위기에 몰린 기업들에 7~8년간 추가 자금을 지원하면서 회생할 때까지 기다려줬다. 그는 “시중은행들은 재무제표를 최우선으로 보지만 우리는 재무제표가 아니라 그 기업인이 걸어온 길과 경영철학을 본다”고 말했다. 재무제표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기업의 역사와 오너의 경영관이 뚜렷한 기업은 언제고 재기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성 회장이 생각하는 ‘지방은행 업(業)의 본질’은 뭘까. 도미지리국을 안주삼아 소주 한 잔을 들이켠 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기업하는 사람도 그렇고 누구든 어쩌다 보면 잘못되는 경우가 있어요. (돈 빌려주는) 은행이 100% 돈 안 떼일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이 지역과 이곳 기업들이 우리 삶의 터전이에요. 그걸 지켜나가는 게 은행의 역할 아닐까요.”


성세환 회장의 단골집 부산명물횟집
쫄깃한 광어·도미회 일품…70년간 자리 지킨 '부산 명물'

식당 이름처럼 부산의 명물 횟집으로 자갈치시장에서 70여년 동안 한자리를 지키고 있다. 김복덕 할머니가 냅?문을 열었고 지금은 며느리 전광자 씨가 운영한다.

50년 넘게 함께 일하는 주방 직원들도 있다. 2002년 부산시 향토음식점 1호로 지정됐다.

주 메뉴는 광어와 도미회다. 활어를 이른 아침 받아온 뒤 3~4시간 숙성시켜 특유의 쫄깃한 맛을 내도록 한다. 값은 주변 횟집보다 조금 비싸다. 광어, 도미회 한 접시에 8만원이다.

식사로는 ‘회백밥’이 나온다. 회와 공기밥과 함께 나오는 국물이 일품이다. 도미 머리와 뼈를 하루 동안 푹 끓여 국물이 진하다. 1인분에 3만원이다. 아나고회(4만5000원), 전복(8만원), 회비빔밥(2만원) 등도 있다. 부산 중구 남포동4가 38. (051)245-4995

해병대 출신 CEO

성세환 회장은 해병대 출신 최고경영자(CEO)다. 해병대 259기로 군생활 내내 북한 땅이 보이는 서북단 백령도에서 근무했다. 성 회장은 “학사 일정을 맞추기 위해 복무기간이 짧은 해병대를 자원했다”며 웃었다. 하지만 그의 해병대 복무 자부심은 대단하다. 자산 100조원 규모의 금융회사 회장이 됐지만 해병대 선배인 거래처 사장을 만나면 ‘깍듯이 모시게 된다’고 했다.

부산=박한신/이태명 기자 hansh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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