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 '싱가포르 國父' 리콴유 잠들다
지난 23일 타계한 리콴유(李光耀) 전 싱가포르 총리(92)는 강력한 경제개발 정책으로 작지만 강하고 살사는 싱가포르를 만든 인물로 평가받는다. 시장에 기반한 경제모델을 추진하면서도 서구식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법치와 강력한 리더십에 바탕한 ‘아시아적 발전모델’을 강조한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정적 탄압, 지나친 통제 등으로 ‘독재자’라는 비판도 받았다. 그가 추구한 ‘아시아적 가치’ 또한 이 시대에 바람직한 모델인가에 대해서도 견해가 갈린다.
고뇌 많았던 ‘총명한 청년’
리콴유 전 총리는 1923년 영국 식민지 시절 싱가포르로 이주한 중국계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중국 북부에서 남부나 동남아로 이주한 한족을 일컫는 객가인(客家人) 출신이다. 혁명가 쑨원, 중국 지도자 덩샤오핑도 객가인 출신이다. 그는 싱가포르 명문 래플스대학에 수석 입학해 빛(光)과 영리함(耀)이라는 이름값을 톡톡히 했다. 훗날 인생의 동반자가 된 두 살 연상의 아내 콰걱추(1920~2010)를 만난 곳도 래플스대학이었 ? 대학 시절 그의 삶은 크게 요동친다. 대공황 여파와 1942년 태평양전쟁을 겪으며 집안 형편이 급속히 기울어 생활전선에 내몰렸다. 그는 암시장에서 고무풀을 내다팔며 생활비를 벌었다.
그는 고향을 짓밟은 일본군에 분노하면서도 1942년 일본어 강좌를 수강했다. ‘생존 우선’ ‘이념보다 실용 우선’이라는 그의 통치철학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정보부에 취직해 연합군의 모스부호 해독 임무를 맡기도 했다. 종전 뒤에는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대 소속인 피츠윌리엄 칼리지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런던 정경대, 케임브리지대에서도 학과 수석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수재였다. 1950년 귀국해 노동 전문 변호사로 활동했다.
36세에 초대 총리로
리 전 총리는 1954년 실용주의 정당 ‘인민행동당’ 창립을 이끌며 사무총장에 올랐다. 변호사 시절 이미 차세대 정치인으로 부각된 그는 1959년 총선에서 인민행동당이 51석 중 43석을 휩쓰는 압승을 거두면서 싱가포르 자치정부 첫 총리가 됐다. 당시 그의 나이 36세였다. 1959년 영국에서 독립한 싱가포르는 말 그대로 ‘허약한 국가’였다. 국민투표로 1963년 말레이연방 가입을 결정했으나 산업화를 추구하는 노선이 다른 구성원들과 달라 충돌을 빚으며 2년 만에 축출되듯이 탈퇴했다.
그는 영어에 싱가포르 ‘제1공용어’ 지위를 부여했다. 엉킬 대로 엉킨 중국계, 말레이계, 인도계의 민족 갈등을 풀어줄 실마리가 ‘강력한 공용어’라고 판단했고, 그 언어로 다름 아닌 식민지 언어인 영어를 택 ?것이다. 그는 싱가포르가 과거의 ‘어촌 국가’로 되돌아가지 않고 세계와 연결되려면 영어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설득했다. 그는 31년간의 싱가포르 통치를 마감하고 1990년 퇴임한 뒤에도 국민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리 전 총리는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재임 시 세 차례, 퇴임 후 세 차례 한국을 찾았다. 그는 1979년 10월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직전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는 ‘아시아적 가치’를 놓고 민주주의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실용과 독재…엇갈리는 평가
리 전 총리는 ‘국가가 개인에 우선한다’는 신념이 강했다. 싱가포르는 세계에서 가장 국가 브랜드가 뚜렷한 나라다. ‘부패가 적고 거리가 깨끗한 국가’라는 긍정 적인 면도 있지만 ‘껌만 뱉어도 벌금을 부과하고 외국인에게도 태형으로 처벌하는 나라’라는 부정적 이미지도 적지 않다. 여기에는 ‘국가가 개인에 우선한다’는 그의 통치철학이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흔히 마키아벨리를 신봉한 ‘청렴한 독재자’로도 불린다. 정적 탄압 등 권위적 통치가 비난을 받기도 한다.
리 전 총리는 2010년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 콰걱추 여사와 2남 1녀를 뒀다. 그의 맏아들인 리셴룽(李顯龍) 총리(63)가 2004년부터 제3대 총리로 싱가포르를 이끌고 있다.
■ 리콴유 어록
“나는 여론조사나 인기투표에 연연하고 구애받은 적이 없다. 지지율 등락에 관심을 갖는 것은 지도자의 일이 아니다.”
-1997년 회고록 ‘내가 걸어온 일류국가의 길’에서
“국민의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될지,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존재가 될지 사이에서 나는 항상 마키아벨리가 옳다고 믿었다. 아무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나는 무의미한 존재다.”`
-1997년 회고록 ‘내가 걸어온 일류국가의 길’에서
“민주주의는 신생 개발도상국에 좋은 정부를 가져다주지 못한다. 아시아의 가치가 미국인이나 유럽인의 가치와 반드시 같아야 할 필요는 없다. 중국적인 문화를 배경으로 한 아시아인으로서 나의 가치는 정직하고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정부를 만드는 데 있다.”
-1992년 11월 일본 도쿄에서 한 연설 중
“나는 시민들의 일상생활에 개입한다는 비난을 종종 듣는다. 맞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싱가포르는 오늘날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이다. 한 줌의 후회 없이 말하건대, 누가 거리에 침을 뱉는지, 어떤 언어를 쓰는지, 이런 문제에까지 개입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경제적 번영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1986년 독립기념일 발언 중
신동열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shin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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