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사업 성장 한계에 부딪힌 김흥국 회장의 '승부수'
인수금융 의존도 크다는 지적도
하림그룹 "현금 동원력 6000억원에 육박", 곡물 사업으로 '가치 창출'
이 기사는 01월14일(04:42) 자본시장의 혜안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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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610억원’. 팬오션의 새주인이 되기 위해 하림컨소시엄(하림그룹과 JKL)이 지불하기로 한 금액이다. 이 중 8500억 원은 팬오션 유상증자에 참여할 돈으로 시쳇말로 채권단들의 ‘빚잔치’용이다. 글로벌 사모펀드 운용사인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 (KKR)조차 매각측의 ‘밸류에이션(가치 평가)’이 너무 높다며 본입찰 참여조차 포기한 거래에 하림은 왜 뛰어든 것일까. 하림과 JKL이 띄운 ‘승부수‘의 배경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예상 깬 하림의 결단
회생절차를 진행 중인 팬오션 매각 이 ‘유상증자+회사채’ 구조로 나왔을 때 인수 후보들은 유상증자 규모가 5000억원 안팎일 정도로 예상했다. 하지만 법원과 채권단은 신주 발행 규모를 ‘최소 8500억원’으로 제시했다. 신주를 배정받은 곳은 팬오션 지분 58%를 갖게 될 터였다. 팬오션을 매각하는 과정에서 채무가 더 들어나는 것을 방지하겠다는 게 매각측의 의도였다.
이에 대해 KKR, SM그룹, 한국투자파트너스 컨소시엄, 도이치은행 등 하림을 제외한 다른 인수 후보들은 모두 인수 포기를 선언했다. 사모펀드 업계 관계자는 “유상증자 규모의 차이는 인수자쪽에서 보면 밸류에이션 산정에서 차이가 크다”고 지적했다. 5000억원만 투입하고 나머지는 팬오션 회사채 발행으로 조달하는 것과 8500억원을 신주 인수에 넣어야 할 때와는 ‘거래 배수’가 크게 달라진다는 얘기다.
인수 후보들 대부분은 ‘재입찰’을 예상했다. 하지만 하림이 매각측의 제안을 과감히 받아들이면서 단독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이달 말까지 본실사를 마치면 3월께 최종 인수계약에 서명할 수 있을 전망이다.
'8500억원 유상증자'안이 나오기 전까지만해도 가장 강력한 인수 후보는 KKR였다. 글로벌 네트워크를 무기로 KKR은 팬오션 인수 후 계획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세워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팬오션이 리오틴토 등 호주의 대형 자원업체들을 고객으로 확보하고 있지 못하다는 단점을 KKR이 보완해 줄 수 있다는 게 계획안의 골자였다. 투자은행(IB) 업계 관계자는 “KKR이 팬오션 주요 임원들을 만나 자신의 계획을 설득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SM그룹의 우오현 회장도 강한 인수 의지를 드러냈다. 중견기업연합회 부회장이기도 한 우오현 SM그룹 회장은 중견기업들과의 모임에서 팬오션 인수를 선언하면서 동참을 촉구하기도 했다. 재계 관계자는 “당시 김흥국 하림 회장도 자리를 같이 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우 회장은 하림이 인수전에 참여할 뜻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왜 팬오션에 꽂혔나
하림의 인수 의지는 이들을 압도했다. 팬오션 임원을 영입해 정밀 실사에 참여했을 정도다. 사모펀드 운용사인 JKL을 조력자로 삼을 수 있다는 점도 유리했다.
JKL은 2007년 선진, 2008년 팜스코, 2009년 한강 CM, 2011년 미국 알렌패밀리푸드 등 하림그룹 성장의 발판이 되고 있는 주력 계열사 인수와 관련해 자문을 도맡았다. 하림그룹은 계열사인 에코캐피탈을 통해 JKL이 운용하고 있는 2개의 블라인드 PEF에 모두 LP로 참여하기도 했다. 이같은 긴밀한 관계를 바탕으로 작년 중반부터 팬오션 인수를 준비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림이 공시한 내용에 따르면 신주 발행 금액 8500억원 중 하림그룹은 하림의 최대주주인 제일홀딩스㈜를 통해 6800억원을 취득할 예정이다. 8500억원 중 1700억원은 JKL이 책임진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하림의 ‘승부수’를 설명할 가장 중요한 요인은 성장 한계에 대한 인식을 꼽는다. 사료, 닭고기, 돼지고기 가공 중심의 사업이 외형적으론 커졌지만 이익률이 낮은 데다 조류인플루엔자 등 외부 변수에 의해 크게 흔들릴 수 있다는 단점을 갖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하림의 지난해 매출 7890억원에 달하지만 EBITDA(이자, 세금, 상각 차감 전 영업이익)는 497억원에 불과하다. EBITA 마진이 지난해 5.1%였고, 전년엔 2.1%에 불과했다. 영업이익은 2011년 265억원에서 2012년엔 -126억원으로 떨어졌다. 작년엔 흑자로 돌아서긴 했지만 114억원으로 2년 전에 비해 반토막으로 줄었다.
사료업계 관계자는 “사료 사업이라는 게 곡물을 사와서 배합한 후 포장해서 파는 것으로 새로이 창출하는 가치가 적다보니 마진도 박하다”고 설명했다. 기본적으로 빚을 내 곡물을 사온 다음 판매 후 갚는 구조로 ‘레버리지’를 많이 일으키는 사업으로도 알려져 있다. 회계법인 관계자는 “매출채권만 약간 조정하면 외형은 크게 보이게 만들 수 있겠지만 실제 회사에 남는 돈은 많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흥국 회장은 팬오션 인수에 앞서 미국 등 주요 항구에 있는 곡물 터미널을 인수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도 했다. 기존 사업과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차세대 성장을 위해 필요한 신규 사업에 목말라 했다는 얘기다. IB업계 관계자는 “팬오션은 곡물 등을 운반하는 벌크선 분야 국내 1위인 데다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채무 조정을 통해 클린 컴퍼니(clean company)로 거듭났다”며 “하림이 팬오션으로 눈을 돌린 것은 자연스런 귀결”이라고 설명했다.
◆승자의 독배될까?
하지만 전문가들은 하림과 JKL의 결단이 약이 될 지, 독약이 될 지는 지켜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하림은 6800억원의 자금을 자체 보유 자금과 인수금융 등을 통해 조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작년 말을 기준으로 하림그룹 주요 계열사가 보유한 현금성 자산은 하림홀딩스 1777억원(작년 3분기 말 기준), 하림 286억원, 제일홀딩스 3억원, 팜스코 547억원 등이다. 보유 현금이 넉넉치는 않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하림컨소시엄 관계자는 “작년 말 11월말 기준으로 하림그룹의 현금보유액은 9600억원"이라며 "이 중 담보로 들어간 예금 등을 제외하면 사용가능한 현금은 약 5700억원"이라고 말했다. 그는 "제일홀딩스 보유 현금이 적긴 하지만 하림홀딩스, 제일사료, 하림, 선진, 팜스코 등 계열사 지분을 유동화하면 팬오션 신주 참여를 위한 자금 마련엔 문제 없다"고 덧붙였다.
M&A업계 전문가는 “매각측이 매각 대금을 몇 차례 나눠 내도록 배려한 데다 하나대투증권이 인수금융을 주선해 주고 있어 자금 조달에는 크게 문제가 없을 것”이라면서도 “팬오션의 새 주인이 될 하림의 채무 부담이 크다는 것은 장기적으로 봤을 때 팬오션에도 부담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팬오션이 회복세에 있긴 하지만 또 다시 경기 침체의 늪에 빠질 경우 하림그룹에까지 위험이 옮아갈 수 있다는 분석이다. 보고펀드 등 내로라하는 사모펀드 전문가들조차 기업 인수에 과도하게 인수금융을 끌어써 파산을 선언하기도 했다.
한편, 하림 못지 않게 JKL도 이번 거래와 관련해 숙고를 거듭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모펀드 업계 관계자는 “하림이라는 SI(전략적투자자)와 공동으로 조단위 대형 바이아웃 거래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지금껏 JKL이 바이아웃 거래를 여러 건 해왔지만 이번처럼 대형 거래에 뛰어든 것은 처음으로 펀드 운용 전략상의 큰 변화”라고 말했다. JKL는 하림그룹으로부터 팬오션 상장과 함께 이익을 회수할 계획이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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