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한국출판인회에서는 우수편집도서를 선정해 발표한다. 올해도 2013년 6월부터 2014년 5월까지 발행된 도서를 대상으로 최종 당선작을 선정했다. 그런데 이 우수편집도서는 해당 책의 저자에게 주는 상이 아니라, 해당 도서를 만든 ‘편집자’에게 부여된 상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최종 당선작에 대한 평가 내용을 보면 이런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는데, 한 심사위원은 전체적인 구성과 도판의 선정과 배치, 주석 처리의 세심함이 돋보이는 도서이기 때문에 당선되었다고 평한 바 있다. 또 다른 사람은 우리말 구사, 정확한 교열 교정 등에서 이유를 찾은 사람도 있었다.
그렇다면 새로운 책 한 권이 출간되는 과정에는 책의 저자 말고 누가 더 있을까? 새로운 책이 한 권 탄생하여 세상에 나오는 과정에는 저자 말고도 의외로 많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
먼저 기획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이 있다. 물론 저자가 직접 기획한 도서도 있지만 전문적인 도서 기획자가 기획하여 출간된 도서들도 많다. 정답은 바로 ‘교정교열자’들이다.
흔히 출판 분야에서 교정이라고 칭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포함한다. 하나는 교정(校正)으로 원고를 대조하여 오자, 오식, 배열, 색 따위를 바르게 고치는 작업을 의미하며, 다른 하나는 교정(校定)으로 출판물의 글자나 글귀를 검토하여 바르게 수정하는 작업을 말한다. 교열(校閱) 역시 문서나 원고의 내용 가운데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고치며 검열하는 작업을 말한다.
오·탈자, 책의 신뢰도 결정교정교열자들의 업무가 내포하고 있는 가장 직접적인 의미는 오·탈자가 없는 서적 내지 정서법에 부합하는 서적을 발간하는 데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교정교열자들의 역할은 단순히 오·탈자 하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해당 도서 전체에 대한 신뢰도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에 그 의미가 더욱 크다 할 것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구매했던 학습용 문제집들을 떠올려 보면 이들 교정교열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문제집을 사서 이런저런 내용들을 풀다 보면, 실제 정답과 문제지에 인쇄된 정답이 차이가 있을 때가 종종 있다. 즉 실제 정답은 4번인데 오자로 5번이 정답으로 표기되어 있는 경우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때 해당 문제가 오자라는 사실을 확인한 수험생은 단순히 해당 문제만 잘못 표기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후 마주치는 문제들마다 혹시 이 문제 역시 정답이 잘못 표기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이처럼 오·탈자는 단순히 해당 문제 하나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해당 도서 전반적인 신뢰도에 영향을 주는 요인이 된다. 즉 앞 부분에 마주친 오·탈자로 인해 이후 해당 서적에 대한 신뢰도 전체가 영향을 받는 것이다.
각인된 정보 맴도는 ‘기준점 효과’이런 심리적 현상을 행동경제학에서는 기준점효과와 불충분조정으로 설명한다. 기준점효과란 ‘닻 내림 효과’라고도 하는데, 이는 배가 어느 지점에 닻을 내리면 그 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근처를 맴도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미리 각인된 정보를 기준점으로 삼아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이런 기준점효과는 초기 행동경제학자 중 한 명인 트버스키와 카너먼이 1974년 <사이언스>를 통해 처음 제시하면서 알려졌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유엔 가입국가 중 아프리카 국가가 차지하는 비율을 물어보는 실험을 수행하였다. 그런데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제비뽑기로 0에서 100까지의 숫자카드 중 하나를 뽑게 했다. 그 결과 제비뽑기에서 높은 숫자를 뽑은 사람일수록 높은 비율로 대답하고, 낮은 숫자를 뽑은 사람일수록 낮은 비율로 대답하는 기이한 현상이 확인됐다.
제비뽑기로 뽑은 숫자는 사실 유엔 가입국가 중 아프리카 국가의 비율과 아무 관계가 없는 무의미한 숫자일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숫자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65를 뽑은 사람은 비율을 짐작할 때 65%라는 비율을 기준으로 짐작해 65에 가까운 숫자로 대답하였고, 20이라는 숫자를 뽑은 사람은 20% 내외의 숫자로 대답하는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이처럼 제비뽑기로 뽑은 숫자가 기준점이 되어 이후 의사결정 과정에서 이 숫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결론을 도출하게 되는 현상을 가리켜 ‘불충분 조정’이라고도 한다.
이후 진행되었던 매사추세츠공과대(MIT)의 MBA과정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또 다른 실험에서도 같은 결과가 도출되었다.
이 실험은 학생들에게 여러 가지 상품을 제시하고 학생들의 사회보장번호(우리로 따지면 주민등록번호)의 마지막 두 자리 숫자와 똑같은 가격에 그 상품을 살 용의가 있는지 물었다. 그러고 나서 해당 상품에 얼마까지 지급할 용의가 있는지를 물었다. 실험 결과 사회보장번호의 마지막 두 숫자가 높은 사람들은 그것이 낮은 사람들에 비해 보다 높은 금액을 지급할 의사가 57~107% 정도 큰 것으로 나타났다.
“편집은 신의 영역이다”앞서 언급한 출판물의 오·탈자 역시 이와 유사한 효과를 보인다 할 것이다. 한두 개의 오·탈자로 인해 이후 해당 출판물에서 언급하고 있는 많은 내용 모두 의심받게 되는 현상은 기준점 효과와 이로 인한 불충분 조정 과정의 예시 중 하나일 것이다.
오·탈자로 인한 웃지 못할 에피소드는 해외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많이 있다. 이 중 최악의 오·탈자 사건으로 많은 사람이 뽑는 사건이 하나 있는데, 이승만 대통령을 견통령으로 표기한 신문 보도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이 사건은 큰 대(大)를 개 견(犬)자로 착각하여 벌어진 실수였다고 한다.
결국 이 오·탈자는 해당 신문사의 사장이 구속되고 신문 역시 정간되는 사태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오·탈자 하나에 대해 너무 과잉 조치가 아닌가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계적 언론사인 미국 <뉴욕 타임스>는 161년 전에 보도한 내용의 오·탈자가 독자의 제보로 인해 확인되었다는 이유로 161년 만에 정정보도를 낸 적도 있다.
이는 기사에 대한 신뢰도가 무엇보다 중요한 언론사가 오·탈자로 인한 기준점효과 내지 불충분 조정 때문에 신뢰도에 커다란 손상을 받지 않기 위한 각고의 노력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세계적인 작가 스티븐 킹은 교정교열자의 편집 영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창작은 인간의 영역이고, 편집은 신의 영역이다” 순도 100%의 완성도를 추구해야 하는 편집자들의 막중한 책무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 아닌가 싶다. 더불어 교열교정자라는 직업이 갖고 있는 가치 내지 의미 또한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닌가 싶다.
● 닻내림 효과anchoring effect. 배가 어느 지점에 닻을 내리면 그 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근처를 맴도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각인된 정보를 기준으로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일컫는다. 이는 사람들이 어떤 판단을 하게 될 때 초기에 접한 정보에 집착해 합리적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현상을 일컫는 행동경제학 용어다. 예를 들어 명품업체가 매장에 최고가의 물품을 가격표를 보이게 진열하는 것은 반드시 판다는 목적이 아니라, 500만원짜리 가방도 그다지 비싸지 않다고 착각하도록 하기 위한 닻내림 효과를 염두에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박창호 < KDI 전문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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