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단어 ‘해브(have)’는 약방의 감초다. 문장을 쭉 훑어서 ‘가진다’는 의미면 백발백중 시험 정답이다. 먹고, 마시고, 애 낳고, 병 앓고, 준 물건 도로 받고 등 내것에 대한 철저한 소유적 접근이다. 이러한 서양의 ‘have’ 의식은 소유 이데올로기로 자리잡아 우리를 ‘경쟁(競爭)’이란 살인구도 속에 밀쳐 넣었다. 개인이나 사회는 마땅하다는 듯이 살아남는 법을 강구하다 근자엔 ‘독점(獨占)’하라는 메시지에 열광한다.
자연(自然) 그 자체는 경쟁과 독점의 경제 논리에 따른 이익이 없다. 사실상 자본주의는 자본의 축적을 전제하는 불완전경쟁 세계이고, 자연은 완전경쟁 세계다.
자연에 사람이 붙으면 상황은 달라진다. 땅 위에 펼쳐진 재용(財用)의 술(術)은 존비(尊卑)와 귀천(貴賤)을 드러내 보이며 제 각각 달라진다. 그 원인을 궁리함에 있어 ‘거처’는 단연코 한몫을 한다. 지위가 낮은 거처에서 높은 곳으로의 이동은 용모와 몸의 기운을 점점 존귀하게 바꾸어 간다.
거처를 옮기려는 중년의 부부가 있다. 남편은 단독주택을 아내는 아파트를 꿈꾼다. 땅의 입장에서 주택은 무등산 수박이요 아파트는 조롱조롱 포도송이다. 백두산을 뿌리로 백두대간 줄기를 타고 어느 가지 끝에 맺힌 기운을 수박은 독점하고 포도는 경쟁한다. 한 뿌리 하나의 열매인 수박과 더미들의 집합인 포도송이는 그 기운을 받는 역량이 다르다.
독점은 독식이다. 독식은 좋든 싫든, 망하든 흥하든 모든 것을 직접적으로 받는다. 운이 좋아 좋은 땅의 기운이면 내 복이고, 나쁜 땅이어도 내 복이다. 주택은 그렇다. 반면 경쟁은 나눔이다. 나눔은 공존이라 길흉과 화복이 잘게 부서져 영향이 적다. 아파트는 그럭저럭 무난하다는 얘기다.
10층 이하의 같은 동, 같은 라인은 같은 기운의 결계 속 경쟁 관계에 놓인다. 땅 아래 흐르는 생기(生氣)라는 존재에 대한 전제 속에 대세적 운의 향방이 비슷하게 결정된다는 말이다. 10층이라는 숫자에 민감해 할 필요도 없다. 도시 기준일 때 수치다. 6000m 높이 히말라야산에 100층 아파트는 그 생기가 100층을 넘어서고 허허 벌판 나홀로 10층 아파트는 5층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
신이 창조한 모든 물(物)은 유정과 무정을 지닌다. 생물도 아닌 것이 무슨 측은지심이 있겠냐 싶지만 때리면 아프다 소리로 답한다. 생기를 품은 산 역시 그렇다. 사람 마음의 움직임이 기색(氣色)과 언사(言辭)에 드러나듯 생기(生氣) 역시 길함과 흉함으로 그 마음을 내보인다. 그러나 자연은 스스로 그러할 뿐 ‘have’를 품은 바 없고 그저 ‘테이크(take)’ 할 뿐이다.
강해연 < KNL디자인그룹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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