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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가 본 한국사] (25) 개항-근대의 시작과 새로운 국제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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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부터 서구제국이 동아시아에 진출하기 시작하였지만 군사적인 위협이 된 것은 19세기 이후였다. 영국의 산업혁명이 확산되고 면공업과 같은 경공업에서 철강, 전기, 화학 등의 중화학공업으로 공업화가 심화함에 따라서 월등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국가와 서구 제국이 군사적으로 충돌한 것은 아편전쟁(1840~1842년)이 최초였다. 이 전쟁에서 영국에 패배한 중국은 난징조약(1942년)에 의해 상하이를 비롯한 5개의 항구를 개방하고 홍콩을 할양해야만 하였다. 1860년에는 영국과 프랑스는 베이징조약을 체결해 항구를 모두 개방하고 내륙의 하천을 통행하는 권리까지 획득하였다. 중국의 수도가 서양 군대에 점령을 당하고 황제가 피신하였다는 소식은 조선왕조에도 엄청난 충격이었다.

또한 베이징조약을 주선한 대가로 러시아가 연해주를 할양받음으로써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이후 부동항을 찾아 남하하는 러시아와 이를 저지하는 영국·일본 간의 대립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를 규정하는 근본 요인이 되었다. 일본에 대해서는 1853년에 미국이 군함으로 도쿠가와 막부를 위협해 개항을 요구한 이후 1858년에 통상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개항이 이루어졌다.

우리나라에도 1866년에 프랑스가 자국인 신부가 처형된 것을 문제로 삼아 강화도를 점령하고 통상을 요구하였지만 정족산성 전투에서 타격을 입고 후퇴하였으며(병인양요), 1871년에는 미국이 군함을 파견해 제너럴 셔만(General Sherman)호가 대동강에서 화공을 당해 침몰한 사건에 대한 사과와 통상을 요구하였다. 요구를 거부당하자 미국은 강화도를 공격한 후 철수하였다(신미양요). 대원군은 프랑스와 미국이 물러난 것을 서구제국에 대한 승리로 판단해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글을 새긴 척화비를 세우고 쇄국정책을 강화하였다.

개항은 근대의 시작

한편 일본은 1868년에 메이지유신을 통해 ‘왕정복고’를 성취한 후 조선에 새 정부의 출범을 알리는 한편 1811년에 조선통신사가 방문한 이후 단절되었던 외교관계를 회복하려고 하였다. 조선왕조는 일본의 외교문서에 ‘황’(皇)이나 ‘봉칙’(奉勅)과 같이 중국의 황제만 사용할 수 있는 문자가 사용되었기 때문에 접수를 거부하였다. 이에 한국을 침략하자는 ‘정한론’이 일어났지만 일본 정부는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조약 체결을 서둘렀다. 1875년에 군함 운요호(

揚丸)를 보내어 관측을 명목으로 무력시위를 자행하고 강화도에 상륙해 군사적 충돌을 유발한 후에 조약체결을 강요하였다.

대원군의 실각으로 개방적인 자세로 변화되었던 조선정부는 1876년에 일본과 최초의 근대적 조약인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일명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였다.

한국사에서 개항을 근대의 시작이라고 하는 것은 현대 한국인이 살아가는 삶의 양식 거의 전부가 이 시기부터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을 비롯한 일상 용품, 이런 물건을 생산하는 기술과 조직(기업)은 물론, 건물, 도로, 운송수단, 그리고 산업구조, 경제체제, 정치제도, 교육제도, 법률, 언론·출판, 예술·문화에 이르기까지 개항 이후에 시작된 것이 대부분이다. 개항 이전의 유구한 역사가 현대 한국사회의 기저에 흐르고 있어 우리 사회를 서구는 물론이고 중국이나 일본과도 다른 독특한 모습으로 만들고 있음은 틀림이 없지만, 그렇다고 하여 개항이후의 역사를 조선후기의 자연스러운 발전으로 이해할 수 없다. 개항을 기점으로 자급자족적이며 폐쇄적인 농업사회로부터 시장경제가 고도로 발달한 개방된 산업사회로 변화되는 100년간의 대전환이 시작된 것이다.

일본, 불평등한 조약 강요

그러나 개항으로 인해 직접적으로 변화된 것은 국제관계였다. 조선왕조가 체결한 통상조약은 중국과 일본이 서구 열강과 맺은 조약과 마찬가지로 ‘불평등조약’이었기 때문에 조선왕조는 새로운 국제질서에서 가장 낮은 지위인 식민지로 전락할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관세가 매우 낮게 책정되어 국내산업을 보호하기 어렵게 되었으며 관세율의 개정도 상대국과 협상하지 않으면 변경할 수도 없게 되었다(관세자주권의 상실).

일본과 맺은 ‘강화도조약’에는 아예 관세에 대한 조항이 없었는데 조선정부가 전통적인 외교관계를 복구하는 것으로 이해해 관세를 전혀 거론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개항장에 외국인 거류지를 조성, 자유로운 통행을 허용하였으며 외국인의 범죄를 영사관에서 재판하도록 함으로써 치외법권 지역이 형성되었다.

이런 불평등조약일지라도 형식상으로는 ‘강화도조약’의 제1조가 “조선은 자주국이며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라고 규정하였듯이 주권국가 간 대등한 관계라는 형식을 취하였기 때문에 중국과의 전통적인 종속(宗屬)관계를 침해하였다. 이에 대응해 중국은 의례적인 성격이 강하였던 기존의 종속관계를 서구 제국주의가 식민지를 지배하는 것과 같은 실질적 지배 관계로 바꾸려고 하였다.

중국은 임오군란(1882년)을 진압한 후에도 군대를 철수하지 않았는데, 1885년에는 위안스카이(袁世凱·1859~1916년)가 ‘총리교섭통상대신’(總理交涉通商大臣)에 취임해 조선왕조의 내정을 감독하고 심지어 국왕을 교체하려고까지 하였다. 또한 중국은 서구제국과의 조약 체결을 주선하면서 조선이 자신의 ‘속방’(屬邦)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고자 하였다.

1982년에 미국과의 통상조약을 주선하였던 북양대신(北洋大臣) 리홍장(李鴻章)은 제1조에 “조선은 중국의 속방이지만 그 내정외교는 자주(自主)한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조항을 집어넣으려고 하였다가 미국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속국으로 만드려는 중국

중국의 의도를 더욱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은 임오군란 진압 직후에 반포되었던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이다(1882년). 중국 황제가 일방적으로 반포하는 ‘장정’의 형식을 취한 ‘조청무역장정’은 서두에 “조선은 오랫동안 번봉(藩封)이었다”라고 하여 조선이 중국의 황제가 책봉하는 제후국임을 강조하였다. 중국인이 피고인 경우는 물론이고 한국인이 피고인 경우에도 중국 관헌이 재판하도록 하여 치외법권을 더욱 확대하였으며, 연안 항구뿐만 아니라 수도인 한성과 양화진을 개방하고 내륙의 통상도 허용하였다. 그밖에 연안무역권, 연안어업권을 부여하고 5% 관세를 책정하였다.

중국은 조선과 특수관계에 있으므로 이러한 조항이 다른 나라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지만, 조약체결에 임하는 조선왕조의 교섭력을 심각하게 훼손하였을 뿐이다. 이로 인해 일본과 관세협상의 결과 ‘조미수호통상조약’(1882)에서는 인정되었던 관세자주권이 부정되었으며(수출세 5%, 수입세 8%), 영국과는 불평등조약의 완성판인 ‘조영수호통상장정’(1883년)이 체결되었다(수출세 5%, 수입세 7.5%).

이와 같이 개항 이후 조선왕조는 중국과의 종속관계로부터 벗어나는 동시에 ‘불평등조약체제’를 극복해야 하는 이중의 과제에 직면하였다. 더욱이 한반도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영국의 대립 위에 기존의 종속관계를 강화하려는 중국과 중국으로부터 한국을 떼어내어 지배하려는 일본의 이해관계가 충첩해 충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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