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송희 기자 / 사진 장문선 기자] 이를테면 여름 같은 인상이다. 청량하고 서글서글한 얼굴 너머로 고요하게 잦아드는 시선이 그렇다. 쨍한 볕 같기도 하고, 서늘한 밤기운 같기도 한 배우의 얼굴은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간격을 빚어낸다.
최근 영화 ‘좋은 친구들’(감독 이도윤) 개봉 전 한경닷컴 w스타뉴스와 만난 지성은 낯부끄럽지만 영원한 소년을 떠올리게 하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누구나 이면에는 소년, 소녀가 산다고 하는데. 이 배우를 보고 있으면 그 존재감이 너무도 여실히 느껴지는 것이다. 시선에 따라 다른 빛을 내는 지성 안의 소년. 그 분명한 존재감은 벌써 16년 째, 그를 ‘늙지 않는’ 배우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늘 소년 같은, 여름을 닮은 인상을 가졌던 지성은 ‘좋은 친구들’을 통해 연기 변신을 감행했다. 적어도 내게 현태는 이전까지의 지성과는 다른 얼굴이었다.
영화 ‘좋은 친구들’은 세상에 둘도 없는 우정을 나눈 세 남자 현태(지성), 인철(주지훈), 민수(이광수)가 거액의 현금이 사라진 강도화재사건에 얽히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뤘다.
현태는 자신의 가족이 죽었음에도 불구, 조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 경찰 때문에 직접 ‘범인’을 찾기 위해 애쓴다. 그가 사건을 집요하게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친구들마저 의심스러워지고 그것으로 갈등을 겪는 인물이다.
이제껏 지성은 감정을 절제하고 억누르기보다는 폭발하고 쏟아내는 역할을 더 많이 많아왔다. 드라마 ‘뉴하트’ ‘보스를 지켜라’ ‘비밀’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내게는 ‘열혈 캐릭터’의 인상을 자아냈던 터였다.
“그렇죠? 저도 인터뷰하면서 딜레마에 빠졌었어요. 분명 제가 했던 연기와는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다들 저와 닮았다고 하시는 거예요. ‘현태와 비슷하지 않아요?’라고 물어보시면 항상 버벅거려요. 조금 다르긴 한데…. 제가 꼭 거짓말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예요.”
그는 말을 마치면서 멋쩍게 웃었다. “절제한 것 같지만 다 발산했다”는 그의 연기는 그의 말마따나 “조용한 역할이 아닌 감정을 절제한 캐릭터”였다. 주지훈의 인철처럼 온몸으로 감정을 발산하거나 민수처럼 혼란스러운 감정을 극단적으로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래서 인철과 민수보다 상대적으로 약하게 느껴지는 캐릭터라고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는 밸런스가 가장 중요한 영화라고 생각해요. 제가 지켜야 할 포지션이 있었죠. 너무 과하게 연기해서도 욕심을 부려서도 안 되는 캐릭터였어요. 그게 주의했던 점이죠.”
그래서일까? 일부 사람들은 지성이 연기한 현태가 이제까지의 그와 다른 점을 모르겠다고 했다. 하지만 분명 스크린 가득 찬 현태의 얼굴은 단조롭지 않았다. 오히려 무표정한 얼굴에서 적나라한 감정이 마구 드러났던 것이다.
“감독님께 감사했던 부분이에요. 보통 감독님들이 배우를 못 믿으면 클로즈업샷을 쓰지 않으시거든요. 그런데 제 얼굴을 잡으면서 제가 만든 현태를 따라가겠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때 깨달았어요. ‘아 감독님이 날 믿고 있구나’하고요.”
이도윤 감독은 지성의 현태를 믿었다. 그에게 연기를 지도하는 대신 장문의 편지를 건넸다. 이 감독은 “현태는 어떤 인물일까요? 왜 농아와 결혼했을까요? 왜 119가 되었을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라며 질문했고, 현태의 인생을 만들어줄 것을 종용했다. 이도윤 감독의 제안에 지성은 “왜 이렇게 어렵게 하시지? 정답을 알려줘요. 왜 이렇게 복잡하게 해”라며 투정했지만 어느새 자신만의 현태를 완성해갔다.
“현태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현태를 잘 알아야 했어요. 영화에 드러나지 않았던 현태의 과거사건 등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어야 했죠. 제가 생각했을 때, 현태는 서울에서 지방으로 전학을 왔을 것 같아요. 도시에서 와서 적응하지 못했고 민수와 인철로 인해 조금씩 적응하게 됐을 거예요.”
흥미로운 설정이다. 지성만큼이나 ‘좋은 친구들’이 가진 디테일은 확실한 힘을 가지고 있다. 각 캐릭터가 가진 성격과 디테일은 영화의 깨알 같은 재미를 더한다. “허세 부리기 좋아하는 인철은 아이폰을, 우직한 성격의 현태는 2G폰을 사용하는 게 재밌었어요”라고 칭찬하자 그는 잠시 멋쩍은 기색을 하더니 “아 현태가 2G폰을 썼었네요”라며 웃어버린다.
“듣고 보니까 그렇네요. 하긴 현태 같은 성격의 사람들은 기계에 그리 관심이 없잖아요. 전화는 잘 터지면 되고 이 시대에 굳이 발맞춰 가려고 하지 않으니까요.”
디테일하다. 이렇게 촘촘하고 빼곡할 수가 없다. 영화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지성이 만들어낸 현태는 조금 더 입체적이고 디테일한 사연을 가졌다. 그래서 더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인물로 완성된 것이다.
지성이 만들어낸 현태는 인철에 대한 의심, 그것으로 인한 트라우마로 인생이 완전히 뒤바뀐 인물이었다. 트라우마 때문에 성격이 완전히 바뀌었을 것 같다는 지성은 “그게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에 극 중 작은 부분까지 세세히 돌봤다.
“현태의 트라우마를 공감하느냐가 제일 관건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성인 연기자기 때문에 어린 현태를 이해할 수 없죠. ‘그래 어릴 땐 저게 굉장한 상처지’라고 넘어가버릴 수 있다는 거예요. 그게 인생을 바꿔버릴 정도라고 생각하기엔 제가 너무 커버린 게 문제죠. 그래서 더 어려지고, 순수하게 영화를 봐야 했어요.”
그 당시의 감정. 이미 지나버린 감정을 되돌린다는 것은 이미 자라버린 우리에게는 너무도 어려운 일일지 모른다. 이에 지성은 마지막 공항 신을 언급하며 현재 느낄 수 있는 감정을 모두 끌어냈음을 털어놨다.
“공항 신은 되게 마음 아픈 장면이에요. 현태와 인철은 서로의 감정을 뻔히 알고 있는데, 동문서답만 하고 있는 거죠. 그 감정을 표현하기란 정말 어려웠던 것 같아요. 촬영하기 전에도 지훈이와 한마디 말도 안 했어요. 그러다 촬영이 딱 시작됐는데 인철의 눈빛이 진짜 같은 거예요. 연기하는 것 같지 않아서 좋았어요. 보통 연기는 연륜이 있는 분들이 좋다고 여겨지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 소재나 스토리에 따라서 장점이 달라지는 거죠. ‘좋은 친구들’은 딱 우리 나이에 맞게 우정과 의리를 표현한 것 같아요. 우정과 의리에 연륜을 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딱 그 나이 때 느낄 수 있는 감정과 의리. “감정이란 건 때가 지나면 미화되기 마련이니까요”라고 추임새를 넣자, 그는 조곤조곤한 말투로 “중국 영화가 인기일 때가 있었어요”라고 말을 꺼냈다.
“주윤발, 장국영 같은 이들을 보면서 ‘멋있다. 저런 게 남자구나’하고 생각하고 살았어요. 지금 아이들도 ‘좋은 친구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겠죠? 이들이 성장해서 우리 나이가 됐을 때 진짜라고 느끼게 해주고 싶어요.”
그렇다면 지성이 돌이켜 본 ‘우정’이란 것은 어떤 형태를 가지고 있을까. 그는 “우정이나 의리라는 건, 젊은 친구들을 위해 거창하게 만들어진 말 같다”며 야살궂게 웃었다.
“함께 있으면 친구죠. 내 고민 들어주고 슬퍼해 주고. 그런 게 친구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40대를 앞둔 지금은 ‘우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그냥 웃고 말아요. 조금만 서운하게 하면 절교하고 다신 안 보고…. 그런 게 다 부질없다는 거죠.”
해사하게 웃는 얼굴. 그리고 그가 천천히 조곤조곤 털어놓는 감정들은 모르고 지나쳤던 그의 ‘소년’을 한 번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좋은 친구들’은 개인적으로 애착이 가는 영화에요. 잘 만들어진 것 역시 분명하죠. 하지만 그게 제 스스로가 자신만만하게 보이지는 않길 바라요. ‘이것보다 더 잘할 수 있었는데’라는 건 지금은 필요 없는 얘기에요. 당연히 16년 차 배우라면 이 정도 표현은 했어야 하죠. 당연히 했어야 한다고 생각되니까. 그런 게 아쉬운 부분이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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