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루이비통 등 명품 브랜드 19개를 가진 세계 최고 명품기업 LVMH의 장폴 비비어 사장은 계열사 대표 10여명을 불러모았다. 그는 이탈리아 공방의 가방 장인과 한국의 핸드백 주문자상표부착생산(ODM)업체인 ‘시몬느’가 제작한 루이비통 가방을 두고 누가 만들었는지 블라인드 테스트를 했다. 결과는 5 대 5. 명품 계열사 사장들조차 가방만 봐서는 누가 만들었는지 구분하지 못했다. 15년이 지난 지금 시몬느는 ‘세계 1위 핸드백 제조업자개발생산(ODM) 업체’가 됐다. ODM은 개발 능력을 갖춘 제조업체가 판매망을 갖춘 유통업체의 상품 기획·기술 개발·디자인 등을 도맡아 관리하고 제품을 생산해 납품하는 방식이다. 소비자의 트렌드가 빠르게 변화하는 시장 흐름 속에 ODM 방식이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제품 개발능력을 갖춘 한국의 ODM 업체들은 화장품 가전제품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글로벌 톱 브랜드의 러브콜을 받고 있다.
다양한 제품 개발 능력 제조업체ODM(Original Development Manufacturing)은 제품 개발력을 갖춘 제조업체가 판매망을 갖춘 유통업체에 상품을 제작해 공급하는 생산방식이다. 제조기업은 생산에 집중하고 유통업체는 마케팅 등 유통에 집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판매업자의 주문에 맞춰 단순생산하는 주문자 OEM(Original Equipment Manufacturing)과는 다르다. ODM과 OEM 모두 브랜드 없이 제품을 만들어 공급한다는 점이 유사하지만 ODM은 제품 개발능력이 있고 주문자 요구에 맞춰 기술을 자체적으로 개발해 제품을 만들 수 있다.
미국 나이키 본사는 운동화, 운동복 등 제품을 생산하지 않는다. 나이키는 국내외에 생산 공장을 직접 설립하거나 운영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이키가 브랜드 콘셉트와 디자인, 마케팅을 담당하고 제조 등은 외부업체에 맡기는 시스템이다. 해당 제품에 필요한 기술 개발도 아웃소싱 업체가 담당하는데 이런 아웃소싱 방식이 ODM이다. 예컨대 나이키가 오래 뛰어도 발이 편안한 러닝화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하면 ODM 업체가 해당 제품을 연구개발해 만들어내는 것이다. 반면 러닝화 밑창의 소재와 두께 등을 모두 정해주고 제작만 요구하는 생산방식은 OEM이다.
글로벌 브랜드, 한국에 ‘ODM 러브콜’한국기업들이 ODM을 통해 세계 시장에서 위상을 높이고 있다. 세계 3대 화장품 ODM 기업
코스맥스는 글로벌 화장품 브랜드 메이블린, 존슨&존슨,
아모레퍼시픽 등 국내외 150개 주요 고객사의 제품 주문을 받고 있다. 지난해 매출은 전년 대비 20% 성장한 2400억원에 달했다.
한국콜마 역시 암웨이 뉴스킨 등 막강한 브랜드를 고객사로 두고 글로벌 제조기업으로 위상을 높이고 있다.
화장품 분야뿐만 아니라 섬유업체인 한세실업도 ODM 업체로 기업 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은 대표적 기업이다. 세계적 여성 속옷 브랜드 ‘빅토리아 시크릿’과 1년에 두 번 정기적으로 만나 계절별 트렌드와 디자인 등을 논의한다. 제품 생산을 일방적으로 주문하는 갑을 관계의 OEM이 아니라 제품 생산에 협력하는 대등 관계사로 올라섰다.
한국의 ODM 업체들은 과거 많이 사용된 아웃소싱 방법인 OEM과 비교해 많은 장점을 갖고 있다. 단순 위탁제작을 넘어 ODM 업체들은 제품 개발 능력을 갖추고 있어 유통업자와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특정 기술에 대해서는 로열티(사용료)를 받고 사용 원자재 등을 스스로 결정해 생산원가를 절감하기도 한다.
자체 생산 브랜드는 아직…ODM 방식이 떠오른 이유는 빠르게 변화하는 시장 때문이다. 가격경쟁력보다는 시장 대응력이 중시되고 소비자 트렌드에 맞춰 적시에 대응하는 것이 훨씬 중요해졌다. 기업 컨설팅 관계자는 “어느 제품이든 고객의 변화 속도나 폭이 10~20년 전과 비교해 엄청나게 빠르고 커졌다. 글로벌 기업들이 유통에 집중하고 제품 개발과 생산능력을 갖춘 한국 ODM 업체에 계속해서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ODM 업체도 자체 브랜드 생산을 갈망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기 브랜드를 대중에게 알릴 수 없어 인지도가 떨어지고 실질적으로 제품을 기획·개발·마케팅까지 진행했더라도 자기 브랜드 사업보다는 수익이 적다. 같은 제품을 만들어도 소비자에게 직접 판매할 때보다 유통업체에 싸게 공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부 ODM 업체는 이런 단점을 극복하고 자체 브랜드 생산을 위해 인수합병(M&A)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화장품 시장만 봐도
LG생활건강, 아모레퍼시픽 등 일부 브랜드가 시장을 장악한 상황에서 자체 브랜드로 살아남기는 쉽지 않다. 섬유 ODM 업체 중 한 곳은 “자체 브랜드 사업을 펼치고 싶지만 고객사들이 공공연하게 자체 브랜드를 만들면 거래를 끊겠다는 으름장을 놔 고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내부 프로젝트·활동 3자에 위탁하는 아웃소싱, 기업의 유연성 높여줘
아웃소싱(outsourcing)은 기업 내부의 프로젝트나 활동을 외부 제3자에게 위탁해 처리하는 것이다. 인소싱(insourcing)의 반대 개념으로 미국 기업이 구조조정을 할 때 제품 브랜드 유지·재무관리를 맡고 다른 부문을 하청기업이나 개발도상국 기업에 싼 가격으로 발주한 것에서 유래했다.
기업들이 아웃소싱을 하는 이유는 △자체적으로 제공·유지하기에는 수익성이 부족한 업무인 경우 △조직 내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제3자에 문제를 위임하는 경우 △내부적으로 전문성은 없지만 당장 그 기능이 필요한 업무인 경우 등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조직의 유연성과 민첩성을 높이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아웃소싱이기도 하다. 기업환경은 갈수록 빠른 속도로 변화하기 때문에 예측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기업조직의 모든 부문에 투자하기보다 핵심적인 부문에만 집중 투자를 하는 것이 위험에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다. 결국 아웃소싱은 기업의 ‘생존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아웃소싱 개념이 도입됐던 초기에는 특정 기업이 생산하는 상품 중 일부 부품 정도를 외부에 맡기고 본래 기업의 상표를 부착하는 방식인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이 대다수였다.하지만 이제 아웃소싱을 단순 위탁으로 치부하기보다 제조업자개발생산(ODM) 방식으로 제품의 개발 디자인 마케팅까지 맡기고 있다. 2000년 이후 가전 기업들의 제품 생산 과정에서 아웃소싱이 차지하는 비중이 75%를 넘었다는 분석결과도 있다.
손정희 한국경제신문 연구원 jhs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