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고(故) 김수환 추기경의 별명은 자칭 ‘바보’였다. 보일듯 말 듯한 미소와 소년 같은 입매도 그렇게 보였다. 시위 학생들을 잡으러 온 군인들 앞에서 “맨앞에 있는 나를 넘어뜨리고, 그 뒤의 신부들과 그 뒤의 수녀들을 다 넘어뜨리고 가라”며 호통칠 때조차 그랬다. 그런 추기경이 죽기 전에 가장 큰 사회운동으로 펼친 게 1989년의 ‘내탓이오’ 캠페인이었다.
이 캠페인에 얼마나 애정을 보였던지 자신의 차에 ‘내탓이오’ 스티커를 직접 붙이고 다녔다. 1987년 6·10민주화운동이 어느 정도 결실을 맺었지만 정치권은 권력다툼으로 혈안이 돼 있을 때였다. 여야 금뱃지들은 핏대 높여 “네탓”만 외치면서 국민 갈등을 부채질했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1970~80년대 발언과 다른 ‘내탓이오’를 화두로 던지자 모두들 놀랐다. 진보 진영 일각에서는 김 추기경이 ‘보수화했다’며 섭섭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추기경은 “나보고 보수주의자라고 해도 좋다. 지금은 자기반성을 먼저하고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기는 게 먼저다”고 말했다. 이 운동은 나라 전체로 확산됐고 1996년에는 137개국에서 정신운동으로 전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시들해졌다. ‘내탓 운동’은 간데없고 ‘남탓 시비’만 뾰족댄다. 책임은 없고 권리만 있는 ‘의존장애’ 풍조도 넘친다. 능력과 노력에 따른 ‘차이’를 ‘차별’로 간주하고 적대시하는 사람도 많다. 골고루 평등하게 못 살자는 ‘하향 평준화’ 증후군 또한 심각하다.
월스트리트저널 서울 특파원을 지낸 미국 경제 에디터가 최근 “세월호 참사 후 쇼크와 분노, 자책 등으로 한국인들이 집단 의욕 상실에 빠진 상황은 9·11테러 이후 미국과 비슷하지만, 그 충격에 직면한 정치 지도자들의 반응은 사뭇 다르다”고 말했다. 한국에서는 아무도 9·11테러 직후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줄리아니 뉴욕시장처럼 ‘일상으로 돌아가자’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나마 지난 주일 추모미사에서 염수정 추기경이 그런 모습을 보여줬다. 그가 “세월호 침몰을 보면서 우리 자신을 되돌아본다”며 “과연 우리는 우리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있는가”라고 되묻자 신도들은 가슴을 치며 “내탓이오, 내탓이오, 내탓이오”를 외쳤다. 그 자리에는 대통령도 있었다. 자, 이제부터라도 ‘내탓 정신’을 되찾자. 김수환 추기경처럼 ‘참바보’의 표정을 짓고 “오, 내탓이오. 내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 하면서. 나부터! 기초질서를 잘 지키는 일부터! 그렇게 새출발하자.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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