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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마을] 후추로 집세 내고…회계 정리까지…유럽경제 중심에 향신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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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신료의 지구사 / 프레드 차라 지음 / 강경이 옮김 / 휴머니스트 / 304쪽 / 1만6000원


[ 김인선 기자 ]
중세 유럽인에게 향신료는 양념 그 이상의 존재였다. 사람들은 시나몬, 페퍼 같은 향신료를 약재나 음식으로 썼고, 귀한 물건으로 수집했다. 부잣집에선 식사할 때 금쟁반에 향신료를 가득 담아 손님에게 돌렸다. 포도주에 넣어 먹기도 했다. 음식이 보이지 않을 만큼 향신료를 덕지덕지 뿌려 먹는 일도 있었다. 중세형 과시적 소비였던 셈이다.

《향신료의 지구사》는 향신료의 이동이 세계 역사에 미친 영향을 고대부터 현대까지 훑어 본 책이다. 시나몬, 클로브, 페퍼, 넛메그, 칠리페퍼 등 다섯 가지 향신료가 어떤 경로로 아시아에서 유럽, 아메리카 대륙 등으로 전파돼 그들의 식탁에 오르게 됐는지 살펴본다. 국내에선 페퍼(후추)와 칠리페퍼(고추)를 제외한 나머지 향신료를 약재로만 써와 낯설지만 중국 남부와 동남아시아, 인도와 아라비아 등지에선 고대시대부터 교역을 해왔을 만큼 귀중하게 여겼다.

대부분의 향신료는 원산지인 아시아를 벗어나면 재배하기 힘들다. 고대 유럽인들은 이국의 향신료를 소문으로 접하며 다양한 전설과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천국에서 시나몬 같은 냄새가 날 것이라 상상하기도 했다.

중세가 되자 향신료는 동서양 문물 교류의 중심으로 솟아 올랐다. 계기는 십자군 전쟁이었다. 전쟁이 지속되며 십자군의 식단에 페퍼, 넛메그, 클로브 등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상인들은 유럽에서 가져온 양모와 옷을 아라비아의 향신료, 과일, 보석과 바꾸어 팔았다. 전쟁이 지속되면서 유럽인의 식습관은 천천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향신료는 점점 유럽 경제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가 됐다. 11세기 영국 런던의 어시장 빌링스게이트에 정박한 배는 잉글랜드 왕에게 페퍼로 통행세를 냈다. 페퍼콘(통후추)으로 집세를 냈고, 유럽의 몇몇 도시에선 페퍼로 회계를 정리했다. 당시 영국에서 페퍼 1파운드는 소작인의 3주치 임금에 해당했다. 향신료는 곧 돈이었다.

15세기 말부터 19세기까지 포르투갈, 에스파냐, 네덜란드, 영국 등은 향신료를 더 많이 얻기 위해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두 지역에서 서로 치열하게 싸웠다. 경쟁은 때때로 피를 불러왔다. 네덜란드는 넛메그와 클로브 시장을 통제하기 위해 인도네시아 반다 제도에서 나는 클로브 나무를 베어버리려 했다. 원주민들이 이를 거부하자 그들을 죽이고 노예를 데려와 일을 시켰다. 사학자 펠리페 페르난데스 아르메스토는 저서《개척자》에서 “그들은 포용으로 시작해서 학대로 태도를 바꾸더니 유혈 사태로 마무리했다”고 평했다.

향신료가 아니었으면 미국의 뉴욕 맨해튼은 네덜란드령이 될 뻔했다. 1616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뉴기니 서쪽의 작은 화산섬인 룬 섬을 차지해 넛메그 산지를 손에 넣었다. 그런데 이곳 주위에 영국의 전초 기지가 있었다. 1665년 영국 함선이 룬 섬에 정박해 네덜란드 사람들을 쫓아냈다. 그 뒤 네덜란드인이 와 다시 영국인을 몰아냈다.

영국은 앙갚음을 하기로 했다. 이번엔 룬 섬이 아니라 네덜란드가 1626년 인디언 부족에 장신구를 주고 산 맨해튼 섬을 타깃으로 정했다. 영국군을 과대평가한 네덜란드군이 항복했고, 영국은 뉴암스테르담을 차지해 뉴욕이라 이름 붙였다. ‘브레다 조약’의 뒷이야기다.

김인선 기자 indd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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