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디트로이트 뒷골목
선술집에서 노래 부르던 비운의 가수 로드리게스
음반 내놨지만 6장 팔려
인종차별 심했던 남아공에서 수백만 장 팔리며 영웅으로
정작 그 주인공은
30년간 공사장 인부로 살아…
영화로 쓰는 경제학원론 ‘서칭 포 슈가맨’을 통해 본 해적판 경제학
1969년 초겨울, 미국 디트로이트의 밤은 을씨년스러웠다. 비 오는 밤이면 시내 외곽의 낡은 선술집에서는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슈가맨, 서둘러 주겠니. 이 삶의 풍경이 너무 지겹거든. 푸른 동전을 줄 테니 가져다줘. 내 무지개색 꿈을 돌려줘.” 묘한 목소리였다. 어둡고 쓸쓸한 디트로이트 거리와 골목들을 부드럽게 감싸는 듯한 음색. 사람들은 목소리의 주인을 가리켜 ‘거리의 음유시인’ 또는 ‘도시의 현인’이라 불렀다. 그가 뭘 하는 사람인지, 왜 노래를 부르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음반업체 관계자도 그 목소리에 매료됐다. 그렇게 해서 제작한 그의 첫 앨범. 하지만 곧 미국에서 가장 비극적인 음반이 된다. 미국 전역을 통틀어 달랑 여섯 장만 팔린 것. 음반업체 관계자는 지금 이렇게 회상한다. “그는 다시 선술집에 나타나지 않았죠. 정말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노래였는데….” ‘서칭 포 슈가맨(2012)’은 1970년대 실존 인물 시스토 로드리게스의 인생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다. 슈가맨은 앨범 타이틀곡 제목이자 로드리게스의 애칭이다.
실패의 복잡한 이유
“수천 번도 넘게 생각했습니다. 마케팅이 부족했나? 사회 비판적인 가사 때문이었을까?” 영화가 가장 먼저 찾아간 사람은 당시 음반을 만든 제작자였다. “어쩌면 로드리게스라는 이름이 문제였을 수도 있죠. 당시 백인들은 라틴계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거든요.” 로드리게스의 실패는 제작자가 수요를 잘못 예측한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래프 1>에서처럼 수요곡선은 예상과 달리 움직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의 앨범도 그랬다. 실제 수요곡선은 예상한 수요곡선 A보다 훨씬 왼쪽에 있었다. 이런 경우 보통은 가격을 낮춰 균형점을 찾지만, 음반이라는 특성상 가격을 크게 내릴 수 없었다. 로드리게스의 앨범이 달랑 여섯 장만 팔린 채 잊힌 이유다.
수요가 적었던 원인은 복합적이다. 수요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소비자의 취향이다. 1970년대 미국 분위기가 사회성 짙은 로드리게스의 가사를 선호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대체재가 있느냐도 영향을 끼친다. 당시 음악시장에는 비틀스라는 거물이 자리잡고 있었다. 제작자의 말처럼 멕시코 출신 이민자 가수라는 시장의 편견이 수요에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어찌됐든 중요한 것은 수요곡선이 예상보다 왼쪽에 있었다는 사실(수요 감소)이다. 그런데 만약 수요곡선이 예상보다 오른쪽에 있는 다른 시장이 있었다면, 그래서 수요가 많은 그 시장에서 로드리게스의 앨범이 팔릴 수 있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이른바 ‘대박’이 났을 것이다. 시장의 성격에 따라 상품의 선호도는 달라지기 때문이다.
해적판의 경제학
로드리게스 앨범의 가치를 높게 쳐준 시장은 뜻밖에도 남아프리카공화국이었다. 당시 남아공은 독재 정권과 인종 차별로 삭막하던 시기. 자유를 외치는 로드리게스의 음악은 곧 저항정신을 대변했다. ‘이것은 음악이 아니라 우울한 체제에 대한 토로다(This is not a Song, It’s an outburst: Or, The Establishment Blues)’라는 노래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다른 미국 가수도 많이 소개되지 않은 때라 대체재도 마땅히 없는 상황. 남아공의 한 뮤지션은 이렇게 말한다. “남아공 사람 중에 비틀스는 몰라도 로드리게스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수백만장의 앨범이 팔렸죠.” 본국에서 여섯 장 판매에 그친 무명 뮤지션이 타국에서 ‘국민가수’가 된 것이다.
처음 남아공에 그의 앨범이 알려진 계기는 명확지 않다. 사실 무역장벽에 부실한 유통망까지 고려하면 미국 음반이 아프리카 국가에서 수백만장이나 팔렸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수요가 많은 상태에서 공급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초과 수요) 음반은 희귀해진다. 가격이 오름과 동시에 이를 살 여유가 있는 사람(수요)은 줄어든다. 보급이 잘 이뤄진 비밀은 ‘해적판’에 있었다. 앨범 대부분이 불법 복제를 통해 유통돼 정상적 무역 경로는 작동할 틈이 없었다.
공사장 인부로 산 뮤지션
남아공 사람들에게 로드리게스는 베일에 싸인 음악 영웅이었다. 미국에서 무명이었던 탓에 그 흔한 인터뷰 자료 하나 없었다. 단서는 한 가지. 앨범 재킷에 실린 사진이었다. 남아공 팬들은 그의 흔적을 찾기 위해 인터넷에 ‘로드리게스 찾기’ 홈페이지를 만든다. 누군가 그를 알고 지내던 사람에게서 연락이 올 것을 기대한 것이다.
1997년 어느 날, 홈페이지를 운영하던 남아공의 한 팬은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온 국제전화를 한 통 받는다.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조심스러운 목소리. “혹시…당신이 제 팬인가요?” 그 팬은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자신이 수십년째 돌려 듣던 음악 속의 익숙한 그 목소리였던 것이다. 로드리게스 본인이었다. “남아공 사람들이 당신을 만나고 싶어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당신은 영웅이에요!” 전화 속 남자는 침묵한다. 자신의 앨범이 타국에서 큰 성공을 거둔지는 꿈에도 모르고 가난한 공사장 인부로 30년을 살아왔던 것이다. 음반 ‘대박’으로 이득을 본 것은 음반을 불법 복제해 유통한 사람들이었다.
로드리게스의 선택은…
로드리게스가 지금이라도 돈을 벌기 위해서는 남아공으로 건너가는 것이 맞다. ‘임금격차설’에 따르면 노동력은 대체로 임금이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이동한다. 로드리게스의 경우도 미국 공사장보다 더 많은 임금을 주는 남아공으로 이동하는 것이 맞다. 1998년 로드리게스는 남아공 땅을 처음으로 밟는다. 그를 위해 마련된 콘서트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자신도 모르는 수십년의 세월 동안 그를 지지해온 팬들을 만나게 된 로드리게스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음악 영웅을 실제로 보게 된 남아공 사람들. 입추의 여지 없이 관객들이 들어찬 공연장에서 로드리게스가 대표곡 ‘슈가맨’의 첫 소절을 부르는 순간, 숨죽였던 관객들은 일제히 환호하며 갈채를 보낸다. 미국에서 변변한 공연 한번 못해본 그였지만 남아공의 수만 관객 앞에 섰을 때의 모습은 완벽한 프로였다.
그래서 그는 남아공에 계속 남았을까. 콘서트가 끝난 후 로드리게스는 디트로이트의 쓸쓸한 골목으로 돌아왔다. 공연으로 번 돈은 모두 주변에 나눠줬다. 지금은 가끔씩 노래를 부르며 공사장 일을 계속하고 있다. 디트로이트 외곽의 오래된 집에 40년째 살고 있다. 선술집에서 노래를 부르던 때부터 살아온 바로 그 집이다. 정식으로 그의 음반을 수입할 수는 없었을까? 하지만 그러려면 미국 음반사에 로열티는 물론 정부에 관세(수입품에 부과되는 세금)까지 내야 한다. 수입 상품의 비율을 정해 놓는 수입 쿼터에 부딪혔을 수도 있다. 모두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할 수 있는 장치들이다. 정식 수입한 로드리게스의 음반 가격은 관세를 문 만큼 더 올라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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