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송희 기자 / 사진 장문선 기자] 스크린 속, 마주한 정재영의 얼굴은 상현 그 자체였다.
공허한 눈동자는 아무런 감정도 담고 있지 않았고, 삶의 의지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남은 인생은 없다”는 그의 목소리가 가슴 한켠을 묵직하게 눌러왔다. 실제도 아니건만, 그런 잔혹한 순간을 연기한 그와 마주했을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까 고민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걱정들은 정말이지 ‘괜한 짓’이었다. 그걸 깨닫는 건, 그를 만나고 불과 5분도 채 되지 않아서였다.
영화 ‘방황하는 칼날’(감독 이정호) 개봉과 더불어 한경닷컴w스타뉴스와 인터뷰를 가진 배우 정재영은 영화 속 모습과는 너무도 판이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옷 좀 갈아입을게요. 너무 불편해서요. 괜찮으시죠? 사진 촬영할 때 입은 옷은 타이트하잖아요.”
성격 좋게 웃어버리는 얼굴과 자주색 체육복 바지, 후드 티셔츠를 마주한 순간 완전히 속았구나 싶었다. 이미 정재영은 상현의 그늘을 벗어나다 못해, 깡그리 날려버린 듯 했으니까.
◆ 방황하는 칼날
불편하다. 영화 ‘방황하는 칼날’은 122분간의 런닝타임 내내 관객들의 마음을 먹먹하게 했다.
피해자와 가해자를 구분할 수 없는 상황 속, 이따금씩 마주치는 현실들은 가슴 속 깊은 곳의 분노를 끓어오르게 했다. 그것은 비단 관객들의 마음만이 아니었을 터. 상현에게 몰입해야 했던 정재영은 “영화 속 상현의 감정은 내 것일 수도, 상현의 것일 수도 있다”고 입을 열었다.
“여러 가지 복합적이었어요. 시나리오 속 상현의 행동을 보면서 상현을 이해하려고 했을 때도 있었고, 반대로 정재영의 감정이 나오기도 했어요. 어떤 게 내 마음이고 상현의 마음인지 모르겠더라고요. 막상 이런 감정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반대되는 감정이 느껴질 때도 있었어요.”
계산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동명의 원작 소설이 그렇듯 행동 보다는 심리 묘사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방황하는 칼날’은 데뷔 19년 차 배우에게도 버거운 작품이었다. 그는 그야말로 연기가 아닌 ‘살아있는’ 상현 그대로이고자 했고 “구체적인 생각 없이” 막연한 슬픔이나, 분노를 느꼈다. 특히 정재영은 안치소 장면을 언급하며 “어떤 연기도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상현이 억관(이성민)과 현수(서준영)를 따라 시체 안치소에 가면서 설득하잖아요. 사실 그럴 필요가 없는데. 아니라고, 내 딸이 아니라고 부정하는데 억관이 ‘따님 맞습니다’라고 냉정하게 말하죠. 억관의 말을 들으니까 할 말이 없는 거예요. 정말 저한테 말하기라도 한 것처럼.”
시나리오에는 시체 안치소에서의 정확한 묘사가 없었다. 정재영은 복도를 거니며 일어나는 심리적 변화들을 애드리브로 표현하며, 명확하게 그려지지 않은 상현의 캐릭터를 채워 넣었다.
“정확히 쓰여 있지 않았어요. 그냥 그 안치소를 가는 복도를 가면서 일어나는 심리적 변화를 애드리브로 표현한 거죠. 딸의 시체를 마주했을 땐 더 했어요. 정말 건조한 반응밖에 나오질 않더라고요. 아무 생각이 안 나는 거예요.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고. 그게 몰입이 안 되는 게 아니라 너무 몰입이 된 상태라 그랬던 것 같아요. 그 자체를 부정하게 되더라고요.”
정재영의 연기만큼이나 ‘방황하는 칼날’이 그리는 상황들은 리얼하다. 실제 사건을 다루는 듯 세밀하고 건조한 시선도 그렇지만, 연일 일어나는 사건들과 평범한 아버지인 상현이 벌이는 실랑이들은 뉴스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기도 하다. 이에 정재영 역시 “시나리오를 접하고 실화인가? 할 정도였다”고 전했다.
“연기를 할 때도 현실적으로 다가가야 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캐릭터가 없었다고 할 수 있죠. 싸움을 잘한다거나, 신분이 높다거나 하는 설정이 아니라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 공장에 다니는 아버지 정도가 상현의 설명이었죠. 나머지는 상황에 맞춰서 어떻게 느끼고 표현할 것인가에 집중해야했어요.”
◆ 보통의 아버지
평범하고 현실적인 모습들. 영화 속 상현과 그의 딸 역시 별 것 아닌 일로 토라지고, 약속을 지키지 못한 미안함을 피자로 대체하기도 한다. 그런 아버지와 딸의 모습은 보통의 아버지, 보통의 가정과 다르지 않았다.
“재밌었던 건 ‘방황하는 칼날’ 속 집안 분위기도 화목한 것도 아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는 거예요. 사실 그런 게 보통 집안의 분위기라고 생각해요. 우리 집도 그렇거든요. 영화 속에서 나오는 캐치볼 하는 부자가 아니라. 채널권으로 싸우기도 하고, 목욕탕 가서 등 밀어주는 게 귀찮아서 때밀이에게 맡겨버리기도 하고.(웃음) 그런 게 보통 집안이라고 생각해요.”
실제 정재영 역시 두 아들을 슬하에 둔 아버지다. 그는 솔직한 ‘부성’을 언급하며, 영화와는 달랐던 실제 부자지간의 에피소드를 밝히기도 했다.
“옛날에 아내가 아들에게 자전거 타는 걸 알려주라고 하더라고요. 잡아주는 게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 거예요. 쫓아가는 것도 귀찮기도 하고.(웃음) 캐치볼도 한 번 해봤는데 자꾸 엉뚱한 데 던지니까 할 맛이 안나요. 주우러 가기 바쁘고…. 너무 영화를 흉내 냈나 싶기도 하고. 좋은 아버지는 인내력이 있어야 하나 봐요.”
시종일관 유쾌하다. 스크린 속 상현을 지우고도, 배우 정재영이 가진 무게와는 다른 분위기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농담을 던지고, 분위기를 움직였다. 진지한 얼굴이기에 더 웃을 수밖에 없는 상황들은 이전 장진 감독의 작품 속에서 만났던 정재영의 모습 같기도 했다.
“장진 감독과 같이 작품을 안 한지 꽤 됐죠. 사실 여건 상 자주 함께 할 순 없어요. 또 특정 감독과 오래하면 극단 분위기가 나곤 하니까…. 관객이 볼 때 질릴 수도 있어요. 배역만 바뀌는 느낌이 드니까요. 그럼 진짜 같은 느낌이 떨어지잖아요. 식상함도 느낄 수 있겠고요. 관객에게 영화는 실제 같아야 하는데 편견을 가지고 시작할 수 있어요.”
장진 감독의 영화 속 정재영이 익숙하다면 최근 ‘내가 살인범이다’ ‘열한시’ ‘방황하는 칼날’ 등의 진지한 모습이 멀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관객들의 또 다른 착각이다. 그는 늘 코미디와 정극의 간극을 흔들림 없이 오가고 있었으니까.
“최근엔 코미디를 안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요. 최근작들을 보시고 무거운 것만 한다고 생각하실 수 있죠. 찍을 땐 연달아서 찍지 않았는데 개봉하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올해 초 ‘플랜맨’이 개봉했지만, 그런 분들은 ‘방황하는 칼날’ 속 상현이 저인지 모를 걸요. 그런 걸 보면 무거운 것, 가벼운 것의 의미가 없어요. 그렇게 그냥 쌓여가는 게 좋은 것 같아요. 한 작품, 한 작품씩. 결국 작품은 남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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