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굿라이프 OS' 해외취업 고희수(영진전문대 컴퓨터정보계열 졸)
철저한 '주문식교육' 승부수… 기업맞춤형 대비반·현지학기제 운영
빠르게 변화하는 지식경제사회에 걸맞은 인재상은 '간판보다 실력'입니다. 틀에 박힌 안전제일 직업관을 벗어던지고, 청년층이 새로운 잡프런티어의 주역이 돼야 한다는 인식도 확산되고 있습니다. '스펙초월 채용문화'로의 사회적 인식 전환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이에 한경닷컴과 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는 새로운 롤모델이 될 우수 전문지식인과 이들을 배출한 맞춤형 전문대 교육프로그램을 소개하는 공동기획 시리즈를 마련, 격주로 연재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우리 나이 서른다섯의 남자. 서울의 한 외국어고를 나와 수도권 4년제대 법대에 차석입학했다. 평탄했던 인생곡선은 그러나 거기서부터 급격히 흔들렸다. 99학번이었던 그가 대학 중퇴 후 ‘알바’와 ‘공장노동자’를 거쳐 12년 뒤 선택한 곳은 전문대였다. 승진이 빠른 고교 동기들이 대기업 과장을 달 무렵, 늦깎이 11학번은 이제야 졸업장을 받고 해외기업의 신입사원이 됐다.
올 초 영진전문대 컴퓨터정보계열을 졸업하고 다음달 1일 일본 오사카 소재 통신장비 판매업체 굿라이프 OS에 입사하는 고희수 씨(34·사진)의 얘기다.
출국을 앞둔 지난 21일 인천의 한 카페에서 만난 고 씨는 “전문대는 꿈을 이룰 수 있게 해준 고마운 존재”라며 “소위 스펙만 생각하고 단지 전문대란 이유로 선택에 두려움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강조했다.
그의 20대를 멀찍이 돌아오게 만든 것은 가난이었다. IMF 여파로 집안 사정이 나빠진 게 컸다. 대일외고 일본어과를 졸업한 고 씨는 원래 가고 싶었던 대학 일본어과를 포기했다. 대신 인천 집에서 가깝고 1년 전액 장학혜택이 주어지는 인하대 법대에 진학했다.
하지만 고 씨가 대학을 다닐 수 있었던 기간은 장학금을 받는 1년뿐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버지가 위암 판정을 받았고, 병원비는 고스란히 집안의 빚이 됐다. 어머니에게만 가계 부담을 지울 수 없었던 고 씨는 결국 대학을 1년 만에 중퇴해야 했다. 사회생활을 갓 시작한 고졸이 할 수 있는 건 아르바이트와 공장 생활밖에 없었지만 그는 닥치는 대로 일했다.
그렇게 빚을 갚고 집안도 웬만큼 안정된 20대 후반, 고 씨는 고교시절부터 가져온 일본 생활의 꿈을 다시 꺼내들었다. 일본 취업을 목표로 사방팔방 알아보던 그가 ‘이 곳에서라면 할 수 있겠다’는 느낌을 받은 곳이 바로 대구에 위치한 영진전문대였다. 소프트뱅크 등 일본 유수기업에 졸업생을 취업시킨 실적이 연고도 없는 지방의 전문대로 고 씨를 이끌었다.
고 씨가 영진전문대를 택한 이유는 탄탄한 주문식교육 커리큘럼이다. 학교는 철저히 일본 기업의 수요를 반영해 교육과정을 개설했다. 그가 속했던 ‘일본 IT기업 주문반’은 현지 기업과의 네트워킹을 통해 일본어와 프로그래밍 기술, 현지문화 적응능력을 고루 습득하게 했다. 2학년 때는 일본에 6주간 체재하는 현지학기제를 운영해 학생들의 적응과 해외취업을 적극 도왔다.
영진전문대 김기종 교수(컴퓨터정보계열)는 “교육받는 학생들이 어떤 기업에 취업할지가 최우선 순위”라며 “기업이 요구하는 사항을 주문받아 이에 맞춰 학생들을 가르치므로 성과가 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고희수 학생은 30대에 늦게 입학해 걱정했지만 늘 성실하게 학교생활에 임했다. 일본 취업도 나이가 많으면 불리한데 실력으로 극복했다”고 귀띔했다.
- 외고 졸업, 대학 중퇴, 그리고 30대에 전문대 입학. 이력이 특이하다.
“사연이 있었다. 집안 사정이 안 좋았다. 사실 가고 싶었던 곳은 서울 소재 대학 일본어과였는데 인하대 법대 99학번으로 들어갔다. 인천 집에서 다닐 수 있고 장학금도 받을 수 있어서였다. 차석입학이었는데, 차석에게는 1년간 장학금이 주어졌다. 그 뒤엔 등록금을 스스로 벌어서 다니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1년만 다니고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 무슨 일이 있었나.
“아버지가 위암 판정을 받았다. 집이 항암치료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빚도 수천만 원으로 늘었다. 휴학 후 군 복무를 마치고 왔지만 등록금을 마련할 길이 없어 복학을 하지 못했다. 빚부터 갚아야겠다는 생각에 여러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PC방, 예식장, 전단지 아르바이트 등 가릴 것 없이 했다. 고졸 학력에 일할 수 있는 게 얼마 없더라.”
- 힘들었겠다. 아르바이트로는 빚을 갚기 힘들었을 텐데.
“빚도 빚이지만 아르바이트로는 불안했다. 전망도 없고. 그래서 직업학교에서 3개월 코스로 일을 배워 안산에 있는 공장에 들어갔다. 휴대폰 기판에 도금을 하는 회사였다. 2~3년 정도 일했던 것 같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직장을 한 차례 옮겼다. 인천의 항공사 기내식 캐터링 담당하는 공장이었다. 흔히 말하는 ‘공돌이’ 생활을 했다.”
- 공장 근무는 만족스러웠나.
“무엇을 하고 싶다, 그런 꿈보다는 일단 먹고 살아야 하니까…. 그렇다고 해서 직장에 대해 큰 불만은 없었다. 다시 대학에 입학하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 어떤 계기로 전문대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대일외고 일본어과를 졸업했다. 그때부터 일본에서 생활해 보고 싶은 마음은 늘 있었다. 현실적 문제 때문에 접어둔 건데, 20대 후반쯤이었을 거다. 더 늦어지면 안 되겠다 싶었다. 공장 생활로 평생을 살기엔 미래가 불투명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못해보고 이대로 인생을 보낼 순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일하며 모은 돈으로 공부를 해서 일본에 가보자고 결심했다.”
- 늦은 나이라 결심이 쉽지 않았을 텐데.
“원래 99학번이었던 내가 11학번으로 입학하게 됐다. (웃음) 일본 취업을 대비할 수 있는 전문대를 수소문해 입학한 게 32살 때였다. 이곳저곳 알아봤는데 학원 같은 곳에서 단기코스로 준비해 일본에 가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 해선 일본에서 살아남기 힘들 것 같았다. 그때 알게 된 게 영진전문대였다. 여기다 싶었다.”
- 어떤 점이 그렇게 마음에 들었는지 궁금하다.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커리큘럼이 잘 짜여 있었다. 졸업생의 소프트뱅크 입사 등 해외취업 실적도 우수했다. 대학에 다시 들어가 시작하기엔 적지 않은 나이여서 실적을 안 볼 수 없었다. 일본 취업이란 절실한 꿈이 있었기 때문에 4년제대냐, 전문대냐가 중요하지 않았다. 학교 졸업 후 곧바로 현지 취업에 성공할 수 있을지가 최우선 판단 기준이었다.”
- 굳이 전문대를 택한 이유는. 학비가 싸고 기간이 짧아서인가?
“전혀 아니다. 커리큘럼과 실적을 봤다. 4년제대 중에선 이렇게 전문적으로 일본 취업을 준비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교육과정이 일본 현지와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는 게 중요하다. 현지 회사를 많이 알고 있는 컨설턴트가 직접 상담해주고, 면접 대비나 이력서 작성 연습도 열심히 준비시킨다. 막연한 조언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도와주고 실전처럼 대비하게 해주는 게 가장 좋았다.”
- 학교생활은 어땠나. 기억에 남는 점이 있다면.
“짧게 다녔지만 4년제대에선 스스로 알아서 해야 했는데, 여기는 안 그렇다. 립서비스가 아니라 교수님들 열정이 엄청나다. 학생 취업 시키려고 같이 밤을 샌다. 학생 한 명, 한 명에 무척 신경을 쓴다. 4년제 다닐 때는 못 느낀 감정이랄까. 고등학교 같다는 불평도 있었지만. (웃음) 오전 8시30분부터 오후 10시까지 학생들과 함께 씨름을 하니 취업이 안 될 수가 없다.”
- 학교에선 주로 뭘 배웠는지.
“일본 IT기업의 주문을 받아 커리큘럼을 구성하는 주문식교육반이었다. 크게 일본어와 프로그래밍을 공부했다. 3년 안에 두 가지를 해내는 게 힘들었다. 일본어(JLPT)는 고교 때 3급 정도였는데 다 잊어버려 히라가나만 아는 수준이었다. 학교에 와 1급을 땄고 회화도 가능한 수준이 됐다. 프로그래밍은 아예 까막눈이었다. 그랬던 내가 일본 IT회사에 프로그래머로 취업하게 됐다.”
- 꼭 해외취업을 하고 싶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솔직히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어려운 상황에 굴하지 않고 더 나은 도전을 위해 일본에 간다, 그런 다짐을 했다. 일단 고교는 괜찮은 곳을 나왔기 때문에 ‘쟤 왜 저렇게 몰락했냐’는 주변의 시선도 느껴졌다. 그 시선 때문만은 아니지만, 그동안의 꿈이나 미래를 생각해서도 일본 취업에 도전해 꼭 성공하고 싶었다.”
- 오사카 소재 굿라이프 OS란 회사에 입사했다고 들었다.
“4월1일부로 굿라이프 OS의 세일즈프로모션 크리에이티브팀(SP사업부)에 입사한다. 전문대 졸업생이 가는 기업 중에선 국내보다 조건이 여러모로 나은 편이다. 회사가 지금 주로 하는 일은 오피스 크리에이팅인데, 앞으로 회사 차원에서 IT 분야에 집중투자 할 계획으로 알고 있다. 입사하는 부서가 회사가 키워주는 분야란 점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 아직도 전문대졸은 취업의 질이 낮다는 인식이 있다. 해외취업은 좀 다른가?
“프로그래머 같은 경우 대부분 국내 기업은 잔업 수당이라든지, 근무환경도 열악한 편이다. 아무래도 일본 기업이 그런 면에선 대우를 잘해주는 편이다. 일본에선 국내 대학 학벌이 별 의미가 없다. 물론 일본에서도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나 KAIST 정도는 알지만 나머지 대학들은 잘 모른다. 4년제대냐, 전문대냐가 아니라 실력으로 어필할 수 있는 조건이다.”
- 전문대를 다녀보니 어떤가. 추천해주고 싶은지.
“4년제와 전문대를 구분하기보다는 하고 싶은 일에 맞춤한 학과에 가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전문대도 길은 많다. 자기관리 잘하고 원하는 분야가 뚜렷하다면 ‘전문대라서 안 된다’는 건 없을 것 같다. 나는 남들보다 좀 늦었다. 많이 아쉽다. 집이 어려웠어도 차라리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빨리 대학을 마치는 게 나았을 것이란 생각도 했다. 20대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것. 꼭 해주고 싶은 말이다.”
◆ 나에게 전문대란…
고마운 존재다. 전문대가 아니었다면 꿈이었던 일본 취업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시련을 겪었지만 꿈을 놓지 않았다. 그렇지만 제대로 된 방법은 찾지 못했다. 전문대에 가서 비로소 그 방법을 배웠다. 정말로 하고 싶은 게 있다면 학벌이나 스펙이 중요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단지 전문대라고 해서 선택에 두려움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말해주고 싶다.
인천= 한경닷컴 김봉구 기자 kbk9@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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