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황 악화에 치킨게임 '이중고'
각국, 해운 경쟁력 강화 총력전
구조개혁·대형화 지원 서둘러야
김정호 수석논설위원
해운산업이 벼랑 끝에 섰다. 천길 낭떠러지다. 최대 벌크선사인 STX팬오션은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대한해운은 법정관리 후 매각됐다. 1위 한진해운은 견디다 못해 형제기업인 대한항공에 경영권을 넘겼지만 여전히 위기이고, 2위 현대상선 역시 한 치 앞도 못 내다보는 실정이다. 돈이 된다면 다 팔겠다고 내놓았다. 배도, 계열사도, 터미널도, 심지어 컨테이너까지 말이다. 그래도 돌파구는 보이지 않는다.
해운산업은 ‘커맨딩 하이츠’로 불린다. 한 나라의 경제와 산업을 지탱하는 기간산업이라는 뜻이다. 한국처럼 수출주도형 국가는 더욱 그렇다. 경제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60%에 육박하고, 그 수출 물량의 99.7%를 배로 실어 나르는 나라다. 이런 산업구조에서 세계 거대 선사와 맞설 수 있는 국적 선사가 없다는 것은 운임결정력의 상실을 의미한다. 수출 경쟁력이 심각한 위험에 노출된다는 얘기다. 더욱이 국내 선사들은 원유 철광석 액화천연가스(LNG) 등 전략물자 100%를 수송한다. 국가 위기 시에는 군수물자를 운반해야 한다.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산업이라는 뜻이다.
그런 해운산업이 왜 이 지경이 됐을까. 글로벌 금융위기로 물동량이 줄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다. 해운산업은 지금 치킨게임 중이다. 덴마크 머스크, 스위스 MSC, 프랑스 CMA CGM 등 세계 1~3위 선사의 공조에 말려들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형국이다. 3사의 무기는 초대형 선박이다. 국내 해운사들의 주력선은 5000~7000TEU급이다. 반면 3사의 주력선은 1만5000~1만8000TEU급 에코십이다. 연료 효율이 30~40% 차이 난다. 경쟁이 될 턱이 없다. 과거처럼 물동량만 늘어나면 국내 선사들도 덩달아 호황을 맞는 구조가 아니라는 얘기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해운업계에도 한파를 몰고 오면서 빅뱅의 단초를 제공했다. 초대형 선박에 대한 투자가 시작된 시점이다. 국내 기업들은 선뜻 투자를 결정하지 못했다. 실수였다. 그러나 업계만 실기한 것이 아니다. 이명박 정부는 그해 2월 출범과 동시에 해양수산부를 해체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업계를 리드할 컨트롤 타워를 없앤 것이다.
그 사이 세계 주요 선사들은 대대적인 구조개혁에 나섰고, 각국 정부도 대규모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중국은 세계 5위의 컨테이너 선사인 코스코에 대해 100억달러가 넘는 신용을 제공했다. 덴마크 정부는 세계 1위 선사인 머스크에 대해 60억달러의 차입을 지원하고, 수출신용기금을 통해 5억달러를 지원했다.
수혈을 받은 선사는 1만8000TEU급을 넘어 2만TEU급 컨테이너선으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선두 3사는 공조 차원을 넘어 ‘P3네트워크’라는 거대 동맹을 구성했다. 세계 해운업계를 초토화시킬 수 있는 슈퍼 파워다. 체력이 고갈된 세계 8위 한진해운과 16위 현대상선이 과연 버텨낼 수 있을까.
희망이 영 없는 것은 아니다. 지금이라도 과감한 구조조정에 나서고, 대형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면 기회는 있다. 다만 업계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다. 정부가 맞장구를 쳐줘야 가능하다. 박근혜 정부의 해수부 부활은 가뭄의 단비다. 그러나 후속조치는 미미하다. 대선 공약이었던 선박금융공사 설립은 무산됐고, 2조원으로 얘기되던 해운보증기금은 5500억원으로 대폭 축소됐다. 그나마 해운보증기금도 지방선거를 앞둔 부산 민심 달래기 차원이 아니었다면 부지하세월일 뻔 했다.
기간산업의 구조조정에는 정부 역할이 중요하다. 강력한 의지와 정확한 타이밍이 산업을 회생시킬 수 있다. GM을 보라. 미국 정부는 576억달러에 이르는 대규모 공적자금을 적기에 과감히 쏟아부었다. 노조와 퇴직자들의 반발을 꺾고 GM이 뼈를 깎는 구조조정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굳은 정책적 의지 덕분이었다.
국내 해운업계에도 기회를 줘야 한다. 단기 유동성을 해소하는 차원이 아니다. 장기적으로 경쟁력을 갖추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사실상 4면이 바다인 나라다. 해운산업을 이렇게 내버려둬서는 곤란하다.
김정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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