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해 보내고 새날 맞이하는 순간
잘 버텨낸 장한 자신을 칭찬해주자
어려움 이긴 모두 상 받아 마땅하니"
정미경 < 소설가 mkjung301@hanmail.net >
한 해를 보내기 전 얼굴을 보고 싶은 분들과의 모임 자리가 있었다. 평소보다는 좀 호사스러운 식탁이었다. 목이 긴 유리잔에 향기로운 와인이 부어졌고, 달콤한 음식과 육즙이 풍부한 스테이크도 나왔다. 그건 길고 험난했던 장거리경주를 막 마치고 기진한 말에게 주는 당근이나 각설탕 같은 것일 테다. 이런저런 이야기 중에 누군가 물어보았다.
“올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였어요?”
좌중의 사람들 표정이 그랬다. 이런 뜬금없는 질문이 있나. 행복이라니. 내가 그런 걸 헤아리며 살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니까? 멀리 되짚을 것도 없다는 듯 하소연을 하는 이도 있었다. 어쩐지 올해 딸과의 관계가 삐걱거려 마음이 편칠 않았는데 휴대폰에 딸의 번호가 떴다. 그래도 이것이 한 해를 보내려니 마음에 걸렸구나 싶어 밝고 다정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단다. 아무개니? 그랬는데 딸의 목소리는 까칠했다. 잘못 눌렀어요, 아빠. 우린 깔깔 웃었고,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사람들은 힘들고 아팠던 기억들을 다투어 쏟아내었다.
그래도 행복했던 순간을 말해보라 재촉하자, 다들 기억의 갈피를 뒤적였는데, 빡빡한 일상을 뒤로하고 떠난 여행지에서의 시간을 꼽은 이들이 제일 많았다. 그것도 복잡하고 휘황한 곳보다는, 시간과 속도를 잊게 만든 한적하고 고요한 장소들을 떠올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건 역설적으로 발 딛고 살아가야 하는 일상이 행복과는 거리가 먼 곳임을 말하는 것이겠다.
‘기타를 품에 안고 알함브라의 궁전을 내 손으로 연주하는 순간입니다’라고 말한 이는 성공적인 최고경영자(CEO)로 살아오다 지난해 은퇴하신 분이다. 클래식기타를 배우는 것이 꿈이었으나 평생 그럴 시간이 없었는데 최근에 배우기 시작한 기타 실력이 나날이 늘어 드디어 그 곡을 끝까지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공감이 되는 행복의 순간이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흐뭇한 표정으로 듣고만 있던 한 분에게, 당신의 순간도 털어놓으라 재촉하자, 그가 말했다.
“내게 행복의 순간은 요즈음이며 오늘이고 바로 지금 이 순간입니다. 이즈음 깨달은 가장 큰 행복은 무탈의 일상, 특별한 일이 없는 하루입니다.”
그 분이 얼마나 치열하고 열정적인 삶을 사는지 알기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아니, 성철스님 책이라도 읽고 계시는 건가. 그의 설명은 이랬다. ‘아직 춥고 어두운 새벽, 사립문이 삐걱 열리는 소리에 설핏 잠을 깨면 아 오늘도 구순이 가까운 어머님이 건강하게 일어나 산책을 나가시는구나. 부엌에서 또각또각 도마소리와 콩나물국 냄새가 나면 어제와 다름없는 하루가 시작되는구나. 출근해 보면 불경기 속에서도 잘 버텨가는 회사가 또한 고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엇보다도 가족 중에 크게 아픈 사람이 없는 것이 고맙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무탈행복론’에 고개를 끄덕였다. 올 한 해 그에겐들 아무 어려움이 없었겠는가.
끝도 시작도 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은 자의적으로 눈금을 그어놓고, 그 시간의 단락을 자신을 채찍질하는 데 주로 이용해왔다. 하나를 이루어내면 곧 다음 목표를 향해 달음박질치라고 채근했다. 올 한 해 열심히 일 한 건 깨끗이 잊어버려라. 새해엔 더 열심히, 더 온몸을 바쳐 일하라. 잠을 줄이고 서서 식사를 해결하는 한이 있더라도 더, 더, 더 뼈빠지게 일할 계획을 세워라… 안쓰럽지 않은가.
이제 묵은해를 보내고 새 날을 맞는다. 지금 이렇게 살아 숨을 쉬고 한 해를 잘 버텨낸 장한 자신을 칭찬해주자. 갖고 싶었던 게 있으면 스스로에게 선물을 주자. 숨돌릴 틈 없이 몰려오던 아흔아홉의 삼각파도를 온몸으로 이겨낸 나와 당신들은 상을 받아 마땅하니.
정미경 < 소설가 mkjung301@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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