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 앞둔 주택채권 위조…'간 큰 횡령'
본점·창구 직원 공모…현금으로 바꿔가는 수법
허술한 내부통제·불투명한 지배구조가 비리 불러
[ 박신영 기자 ]
국민은행 직원의 90여억원 횡령 사건은 고객의 자산을 금융회사 직원이 몰래 가로챘다는 점에서 파장이 클 수밖에 없다. 또 국고로 귀속될 가능성이 높은 돈이어서 의미가 남다르다는 평가다.
이 같은 어처구니없는 금융사고는 국민주택채권의 만기가 길어 고객이 보유 사실을 잊기 쉬운 허점을 이용했다. 채권을 받아 원금과 이자를 내주는 영업점 직원의 협조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들의 업무 사안을 점검할 수 있는 내부통제 시스템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다는 점도 직원들의 도덕 불감증을 부추겼다.
○관리소홀 틈 탄 ‘지능 범죄’
횡령사건의 주범인 주택기금부 A씨는 만기가 지나고 소멸시효가 다 될 때까지 상당수가 국민주택채권을 찾아가지 않는다는 점을 악용했다.
이번에 문제가 된 1종 국민주택채권은 5년 만기 이후 소멸시효를 5년 더 줘 총 10년간 채권 보유자가 원금과 이자를 상환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때문에 소멸시효가 한 달 앞으로 임박한 채권은 보유자가 사망하거나 채권 보유 사실을 잊었을 가능성이 크다.
A씨는 이처럼 소멸시효가 11월 말로 다가온 채권(2003년 11월 말 발행)의 일련번호를 알아낸 뒤, 백지상태의 채권에 번호를 기입해 컬러프린터로 출력하는 방식으로 위조했다. 이 과정에서 A씨는 영업점 창구 직원인 B씨의 도움을 받았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채권 위조 상태가 워낙 조악해 육안으로도 구분할 수 있는 수준”이라며 “창구 직원의 도움 없이는 절대 돈을 바꿔갈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난 19일 방심한 A씨가 영업점에 B씨가 없는 상황에서 채권 상환을 요구했고, 이를 수상하게 여긴 다른 직원이 본점에 제보하면서 들통이 났다. 이에 따라 국민은행 측은 관련 직원들을 20일 관할 검찰청에 고소 및 출국금지 신청했다.
○연이은 인재(人災) … 왜 이러나
이번 횡령사고에 앞서 국민은행에선 △도쿄지점 부당대출 및 비자금 조성 의혹 △예·적금 담보대출 이자에 대한 과다 수취 의혹이 잇따르고 있다. 자연히 내부통제 시스템에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우선 인사 시스템과 관리·감독 체계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국민은행 인사부는 현재 한 지점 혹은 부서 안에서 같은 업무를 담당하는 기간을 기존 3~4년에서 1~2년으로 줄이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직원들이 여러 업무를 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게 은행 측 설명이다.
하지만 외부의 시선은 다르다. 한 직원이 너무 오랫동안 같은 업무를 하다보면 도덕적 해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이번에 문제가 된 A씨는 2009년 1월부터 주택채권 관련 업무만 해왔다. 검찰에 고소된 전 도쿄지점장은 도쿄에 발령난 것만 이번이 세 번째다.
반면 다른 시중은행들은 업무를 담당한 지 1년이 지나면 불시에 강제휴가를 명령한 뒤 감사작업을 벌이거나 직원 간의 상호견제로 긴장감을 유지한다.
3년 단위로 돌아오는 최고경영자(CEO) 교체기마다 1년 전후로 흔들리는 지배구조도 문제로 지적된다. 잦은 경영진 교체로 임직원이 본연의 업무보다는 ‘줄서기’에 신경쓰다보니 전문성과 책임감이 떨어진다는 설명이다.
국민은행의 한 부행장은 “내부통제 시스템은 우리도 웬만큼 갖춘 편이지만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며 “결국 이를 운용하는 사람들이 부패해서 생긴 인재라는 점에서 부끄럽다”고 말했다.
박신영 기자 nyuso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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