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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성 기자의 '우리의 와인'] 10만병 와인 숨쉬는 동굴, 궁극의 저장고 '라그로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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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성 기자의 와인 칼럼 '우리의 와인' < 5회 >

'운명의 여신은 도전하는 자에게만 미소짓는다'



문제) 아래 사진을 보고 어느 나라 와인저장고인지 맞혀보세요.

1) 와인의 본고장, 프랑스
2) 전통의 와인 강국, 이탈리아
3) 신대륙 와인의 이정표, 미국
4) 한국인이 사랑하는 와인, 칠레
5) 정답없음

정답 말씀드리기 전에 사진 속 와인저장고 설명부터 드립니다.

이 와인저장고는 동굴 속에 있습니다. 동굴 길이는 100m, 높이 5.4m, 폭은 8m 입니다. 'ㅁ'자형 동굴 와인 카브(Cave)입니다. 100m 왕복 2차선 터널 크기입니다. 총 10만병의 와인을 저장할 수 있습니다.

와인은 태양빛과 높은 온도, 건조한 곳, 그리고 움직이는 곳을 싫어합니다. 달리 말하면 습도가 적당하고 온도가 낮고 어둡고, 진동이 없는 곳을 좋아하는 셈이죠. 기온은 약 13도, 습도는 70%로 유지되는 곳이 좋습니다.

습도가 중요한 이유는 코르크 마개 때문입니다. 코르크가 마르면 와인 병 입구 사이에 미세한 틈이 생깁니다. 그러면 공기 중 산소가 와인 맛을 변질시킵니다. 진동도 없으면 좋습니다. 와인이 충격을 받으면 여러 분자구조가 흔들려서 섬세한 맛과 향이 사라질 수도 있거든요. 직사광선도 와인을 변질시킵니다. 와인은 발효음료라 자외선에 취약합니다. 흔히 보는 와인셀러 유리가 자외선을 차단하는 암갈색으로 코팅된 이유입니다.

와인은 포도 재배 및 양조만큼이나 보관, 즉 병숙성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동굴은 최적의 와인저장소입니다.

자 그럼 정답 발표하겠습니다. 5번, '정답없음' 입니다.

이 와인저장고는 한국에 있습니다. (놀라지 않으셨다면 죄송합니다만) 인공 동굴 와인저장고로는 국내 최대 규모입니다. 경기도 곤지암리조트 내 레스토랑 '라그로타' 내부 깊숙한 곳에 있습니다.

직접 와인저장고에 들어가봤습니다. 식사하는 테이블 뒤편으로 돌아가면 경보기가 달린 큰 나무문이 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서늘하지만 촉촉한 습기가 온몸을 덮칩니다. 중앙통로 좌우로 철제 와인 데크 수십개가 서있습니다. 6층짜리 데크마다 1000병 가까운 와인이 누워 숨쉽니다.

프랑스 메를로의 왕 페트뤼스부터 메독 그랑크리 1등급 샤토 라피트 로칠드, 무통 로칠드, 라투르, 오브리옹, 마고 등 세계적 명성의 와인들이 잠들어 있습니다. 이외에도 내로라하는 와인 700종이 보관돼 있습니다.
이탈리아어로 동굴을 뜻하는 이 라그로타 레스토랑에 지난 8월 경사가 있었습니다. 세계적 와인잡지, 와인 스펙테이터(Wine Spectator)가 선정하는 '레스토랑 와인리스트 어워드'에서 2글라스(2 Glasses)를 받았거든요. 국내 호텔·리조트 업계 최초입니다. 보유 와인의 우수성 및 다양성 뿐만 아니라 와인서비스·음식 수준이 세계적이라는 뜻입니다. 와인 분야에서는 미슐랭 별점과도 같은 권위입니다.

지난 26일 2글라스 수상을 축하하는 행사가 라그로타에서 열렸습니다. 40여명 VIP가 초청됐는데요. [우리의 와인]도 운좋게 초대받았습니다. 국내 대표적 와인 소믈리에들과 업계 관계자, 교수, VIP고객 등이 함께했습니다.
이날 주인공은 세계 정상급 와인이었습니다. 행사명이 '궁국의 와인, 전설을 향하다'였을만큼 일반 디너 자리에서 만나기 힘든 고급 와인리스트가 등장했습니다.

본 행사 전 참석자들과 인사를 나누는 리셉션장 샴페인부터 심상치 않았습니다.앙리 지로, 코드누아 로제 브륏 NV(Champagne Henri-Giraud, Code Noir Rose Brut NV). 한병(750ml) 45만원인 이 프랑스 샹파뉴 로제는 장미꽃 한다발마냥 진한 꽃내음을 뿜어냈습니다.
부드럽고 밀도감 있는 탄산은 높은 산도와 만나 짜릿한 목넘김을 선사했습니다. 라그로타 공지현 수석 주방장이 직접 잘라준 스페인 이베리코 산 하몽과의 궁합(마리아주)은 본 행사 와인에 대한 기대를 한껏 높였습니다.

라그로타 측은 본 행사 와인을 블라인드 테스트로 서빙해 재미를 더했습니다. 첫 두 잔은 모두 화이트 와인이었습니다. 한잔은 아주 맑고 깨끗하면서도 향과 맛 모두 복합미가 선명했습니다. 다른 한 잔은 난생 처음 접해보는 듯한 와인이었습니다. 품종과 생산지를 가늠하기 힘들만큼 난해했지만 그 느낌은 강렬했습니다.

정답이 공개됐습니다. 첫번째 잔은 '도멘 자나스, 샤토네프 뒤 파프 퀴베 프레스티지 블랑' 2011 (Domaine de la Janasse, Chateauneuf-du-Pape "Cuvee Prestige Blanc" 2011), 두번째 잔은 '씨네 쿼 넌 콜리브리' 2008(Sine Qua Non, Kolibri 2008)였습니다.
샤토네프 뒤 파프의 신성이라는 자나스의 화이트, 그리고 미국 최고의 컬트와인이라는 씨네 쿼 넌의 콜리브리. 첫 잔에 참석자들 탄성이 터졌습니다.

자나스 퀴베 프리스티지는 자나스 화이트와인 플래그십(최상급)입니다. 론 지역에서 요즘 가장 주목받는 와이너리 중 한 곳입니다. 루산느 70%, 클러헷 15%, 그르나슈 블랑 15%로 만들어진 이 와인은 신선하고 부드러운 산미 그리고 탄탄한 구조감에 복합미를 자랑했습니다. 세계적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로부터 95점(RP·100점 만점)을 받았습니다.

씨네 쿼 넌은 파커가 100점 만점을 가장 많이 준 와이너리로 알려져있죠. 기인 혹은 천재 양조가로 유명한 맨프레드 크랭클이 만듭니다. 그의 와인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창성을 자랑합니다. 콜리브리 역시 그랬습니다. 루산느 69%, 비오니에 31%로 만들어진 이 와인은 어느 와인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만큼 오묘합니다. 황금빛 색깔에 기름같은 감촉, 설탕에 절인 흰 과일의 농익은 향, 유려한 산미 여기에다 오크통 나무 늬앙스가 조화롭습니다. 125만원짜리 이 와인에 파커는 97점을 부여했습니다.

두 번째 블라인드 와인이 테이블에 도착했습니다. 두 잔 모두 레드와인입니다. 폭발하는 검은 과일향 뒤에는 투박한 감초향, 화장수마냥 튀는 제비꽃향, 깊은 산 속 삼나무와 민트향이 뒤따릅니다. 다소 높은 도수에 묵직한 몸집, 중후한 탄닌의 적당한 쓴 맛. 최고급 시라 품종 와인이구나 싶었습니다.

정답이 공개됐습니다. 첫 잔은 미국 나파밸리 컬트와인인 '콩스가르드' 시라 2007(Kongsgaard, Syrah 2007)입니다. 두번째는 호주 컬트와인, 몰리두커의 플래그십 '벨벳 글로브' 2009(Mollydooker, Velvet Glove 2009)입니다. 모두 최고급 시라 와인들입니다.
콩스가르드는 미국 와인업계의 전설로 불리는 와이너리입니다. 노르웨이어로 '왕의 농장'을 뜻하는 이 와이너리 주인은 존 콩스가르드입니다. 노르웨이 이민 후손으로 나파밸리에서 5대째 와인을 만들고 있죠. 그는 대학에서 작곡을 전공했습니다. 베토벤, 슈베르트, 모차르트 등의 교황곡 악보를 오크통에 붙여서 와인을 숙성하는 것으로 유명하죠. 와인에 교황곡도 들려줍니다. 음악을 들으면서 숙성된 와인을 출시하는거죠. 그래서일까요. 콩스가르드 시라는 유명 교황곡마냥 역동적이면서도 균형미가 조화롭습니다.

몰리두커 벨벳 글로브는 이전에 한번 소개해드렸죠.(^^)
벨벳 글로브 시음기 참고 [우리의 와인 1회] 와인 한병에 책보다 많은 철학이 담긴 이유

다시 마셔봐도 콩스가르드와 견주어 복합미가 더 뛰어나다 싶었습니다. 국내 가격도 벨벳 글로브가 87만원으로 콩스가르드(64만원)보다 좀 더 비쌉니다. 벨벳 글로브 2009 RP는 97점, 콩스가르드 시라 2007은 94점입니다.

대미를 장식한 마지막 와인이 도착했습니다. 향은 과일 '폭탄'이지만 우아하고 또 우아했습니다. 실크마냥 부드럽습니다. 탄닌 및 산도, 당도의 균형미가 이날 고급 와인 중에서도 단연 최고였습니다. 잔향 역시 1분 이상 오래 갔습니다.
미국 컬트와인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여성 양조자, 하이디 배럿의 '아뮤즈 부세(Amus Bouche, Heidi Barrett)' 2008이었습니다. 배럿은 미국 컬트와인의 대명사인 '스크리밍 이글' 및 '그레이스 패밀리' 등 와인 양조를 맡아 RP 100점짜리 와인을 5개나 배출했습니다. 메를로 와인인 아뮤즈 부세도 배럿이 책임 컨설턴트로 만든 와인입니다. 그녀의 이름과 초상화가 와인 라벨에 새겨진 이유입니다. RP 92점이고 국내 가격은 136만원입니다.

디저트 와인으로 독일의 '발타사 레스 리슬링 아우스레제' 2009(Balthasar Ress, Riesling Auslese 2009)를 끝으로 와인 퍼레이드는 끝났습니다.

최고급 와인들로 꾸며진 이날 저녁 밥값은 1인당 150만원이었습니다. 라그로타 정기택 총지배인(상무)이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특별한 자리를 마련한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우리 라그로타 수준이 어느정도인지 예전에는 잘 몰랐고 자신감도 크게 없었습니다. 해외에서 상을 받는 식당은 그저 딴 나라 이야기인줄 알았죠. 그래도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 와인 스펙테이터 문을 두드렸습니다. 결과는 뜻밖의 2글라스였습니다. 더 큰 책임감과 함께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더 세계적 수준을 고민하기 위해 소믈리에와 셰프를 홍콩 및 일본 최고급 식당에 견학 보냈고 우리가 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어왔습니다. 수상 기념으로 스태프들에게 무얼 하고 싶냐고 물어보니 그간 도와주신 분들을 모시고 첫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오늘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라그로타의 모든 와인을 책임지는 김희전 소믈리에(지배인)도 떨리는 소감을 남겼습니다.

"이제 4살인 라그로타는 100년 앞을 바라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손자에게 추억을 남겨줄 수 있는 곳이 되면 좋겠습니다. 전설이 되는 와인들처럼 라그로타도 한국 레스토랑의 전설로 남길 바라봅니다."

최근 한식당 처음으로 뉴욕 미슐랭 2스타를 받은 '정식(JUNGSIK)'에 이어 라그로타의 와인 스펙테이터 2글라스 수상까지 한국 와인·다이닝계에 좋은 소식이 많습니다.

공교롭게도 정식의 임정식 셰프와 라그로타 정 총지배인 수상 소감에는 이런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 음식, 국내 와인 레스토랑도 얼마든지 세계와 경쟁할 수 있다, 자신감을 가진다면.'

정식이 뉴욕에 진출할 때 "무모한 도전"이라는 비아냥이 있었습니다. 라그로타가 와인 스펙이터에 도전할 때도 "우리가 설마 되겠어?", "딴나라 이야기 아니야?" 같은 자조도 있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항상 내 꿈을 비웃고, 흠집을 내는 나 자신 그리고 타인들이 있습니다. 반면 그런 사람들만큼이나 자신의 꿈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뚝심있는 사람들도 많죠.

'운명의 여신은 도전하는 자에게만 미소짓는다'고 했던가요.

자신을 믿고 다시 용기를 내보는게 어떨까요. 헛된 꿈은 독이라고 비웃는 차가운 벽을 넘어 언젠가는 훨훨 날 수 있을거라고, 속는 셈 치고 한번 믿어보면 좋겠습니다.

p.s.1) 행사에 쓰인 '콩스가르드 시라' 2007년 빈티지들은 국내 마지막 재고였다고 합니다. 개인 소장 외에는 더이상 저 빈티지를 국내에서 구할 수 없습니다. 여타 와인들도 구하기 쉽지 않습니다. 서울 청담동 SSG푸드마켓 1층 와인숍에 소량 보유 중이라고 합니다.

p.s. 2) [우리의 와인]에서 전해드리는 오늘의 노래는 '거위의 꿈'입니다. 김동률·이적 '카니발'의 원곡도 좋지만 가수 인순이씨의 이 뮤직비디오가 뭔가 더 와닿습니다. [우리의 와인]도 여러분의 꿈을 응원합니다.

글·사진·영상=한경닷컴 김민성 기자 mean@hankyung.com 트위터 @mean_R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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