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성 기자의 와인 칼럼 '우리의 와인' < 3회 >
누군가를 정말로 좋아한다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라.
가까워지고 나면 언젠가는 서로가 상처를 내어 가슴 아픈 인연이 되고 마니.
어떤 분야에서나 최고봉이 있습니다.
자동차로 치면 마이바흐 62(8억5000만원), 롤스로이스 팬텀(7억 5000만원), 람보르기리 아벤타도르(5억7000만원) 같은 거겠죠. 남자들이 좋아하는 시계 쪽을 보면 '명품시계 종착역'이라는 파텍 필립, 바셰론 콘스탄틴, 오데마 피게 등일 겁니다. 시계 최소가격은 보석 하나 박히지 않아도 3000만원 대죠. 파텍 필립은 이 중에서도 '종결자'입니다. 1999년 소더비 경매에서 파텍 필립 18K 시계(1933년 제작)는 123억원에 낙찰되기도 했습니다.
'후덜덜' 하죠?
와인에도 '종결자'가 있습니다. '와인의 전설' 로마네 콩티(Roman?e-Conti)'가 그 주인공입니다. 세계 와인애호가라면 누구나 마시고 싶어하고, 소장하고 싶어합니다.
로마네 콩티가 하이엔드(High-End) 중에서도 하이엔드인 이유는 차마 표현하기도 힘든 깊은 맛과 아득한 향, 유서깊은 와이너리의 역사 그리고 희소성 때문일 겁니다.
로마네 콩티는 프랑스 브르고뉴 본 로마네의 도멘 드 라 로마네 콩티(Domaine De la Roman?e-Conti·DRC)에서 생산합니다. 본 로마네에는 세상에서 가장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포도종 피노 누아(Pinot Noir)를 키워내는 포도밭이 밀집해있습니다.
콩티는 18세기 이 포도밭을 산 사람 이름입니다. 왕자(Prince de Conti, 1717~1776)란 칭호를 가진 높은 분이었죠. 콩티 왕자 이전에는 '라 로마네'로 불렸습니다. 300년 전부터 이미 이 와인은 왕족과 귀족을 사랑을 받았습니다. 피노 누아로 유명한 브루고뉴 와인 중에서도 로마네 콩티는 당시에도 최고의 와인이었죠.
이 포도원을 차지하기 위해 루이 15세의 애첩 퐁파두르 부인과 콩티 왕자가 벌인 '인수쟁탈전' 일화는 유명합니다. 당시 왕이었던 루이 15세는 '라 로마네'를 특히 좋아했습니다. 퐁파두르 부인은 자신을 점점 멀리하는 왕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이 와이너리를 소유하려 했습니다. 왕의 사랑을 독차지한 뒤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했습니다.
루이 15세의 조카였던 콩티 왕자는 권력을 탐하는 퐁파두르 부인을 경계했습니다. 퐁파두르 부인은 콩티 왕자를 내치기 위해 자주 모함했습니다. 콩티 왕자는 그래서 절대 퐁파두르에게 라 로마네를 넘길 수 없었습니다. 1760년 모든 재력을 총동원, 당시 9만2400리브르라는 비싼 값에 포도밭을 사들입니다.
이는 당시 주변 포도밭 가격의 10배가 넘는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결국 콩티 공은 이 와인너리에 자신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당시 정치권력은 가지지 못했지만 영혼불멸의 와인에 자신의 이름은 새긴 셈입니다.
이번 3회 칼럼을 준비하면서 국내 로마네 콩티 유통 현황 및 가격을 취재해봤습니다. 와인 업계 분들을 통해 알아보니 국내에서 로마네 콩티 가격은 1800만~2600만원대더군요. 물론 빈티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2004년 빈티지 가격은 2000만원 정도였습니다.
한병에 2000만원. 중형차 한대 값이죠?
한병은 750ml입니다. 4명이 나눠마시면 한사람이 180ml 정도 마실 수 있습니다. 180ml면 우리가 흔히먹는 자양강강제 박카스(100ml)보다는 많고, 작은 우유(200ml)보다는 조금 적습니다. 몸에 흡수된 뒤 소변으로 사라지는 액체 한잔이 500만원인 셈입니다.
문제는 돈이 있어도 로마네 콩티를 사기 힘들다는 점입니다. 반드시 사전 예약자에게만 판매하거든요. 엉프리메(En Primeur)라고 불리는 사전 예약을 통해 대기 명단에 이름을 올려야합니다. 그러나 이미 전세계 갑부들과 애인애호가들로 대기명단은 꽉차있습니다.
생산량도 매우 적습니다. 포도 품질에 따라 해마다 차이는 있지만 평균 450케이스 정도가 매해 출시됩니다. 와인 1케이스에는 12병 와인이 담기니 한해 6000병 밖에 만들지 않습니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이 중 국내로 들어오는 로마네 콩티는 한해 30병도 안된다는게 와인업계 분들 설명입니다.
설상가상 이 콧대높은 로마네 콩티 한병만 구하는 건 더더욱 어렵습니다. 로마네 콩티는 DRC에서 생산하는 나머지 5종류 와인과 함께 12병들이 상자로만 정식 판매되거든요.
상자에는 로마네 콩티 1병, 라 타슈(La T?che) 3병, 리시부르(Richebourg) 2병, 에세조 2병(Ech?zeaux), 그랑 에세조(Grands Ech?zeaux) 2병, 로마네 생 비방(Roman?e-St-Vivant) 2병 등 12병이 들어있습니다. 진정 로마네 콩티가 마시고 싶다면 나머지 11병도 같이 사라는 DRC의 하이엔드급 자신감입니다. 로마네 콩티라는 왕을 모시는 11명의 호위무사들 같죠? 이 호위무사들 역시 최고급 와인들입니다. 병당 국내 가격이 100만~200만원을 호가합니다.
이 12병들이 로마네 콩티 한상자를 국내에서 얼마에 팔까요? 국내 와인 수입 관계자분 말씀으로는 4500만원 정도라고 합니다. 그저 웃지요.
장황하게 로마네 콩티 이야기를 드린 이유는 최근 로마네 콩티와 나머지 호위무사 와인들을 볼 기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지하 와인 매장 옆에는 특별한 진열장이 있습니다. 2단 진열대 윗칸에는 로마네 콩티가 위용있게 서있습니다. 아래에는 리시부르, 로마네 생비방, 라타슈, 그랑 에세조, 에세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술 전시작품 같은 이 와인들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로마네 콩티는 돈이 있어도 마시지 말아야겠다."
전 로마네 콩티를 마셔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그만큼 돈도 없습니다만 나중에 마셔볼 기회가 있다고 해도 경험해보지 말자 싶었습니다.
김춘경 시인의 시 '누군가를 정말로 좋아한다면'에는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정말로 좋아한다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라..가까워지고 나면 언젠가는 서로가 상처를 내어 가슴 아픈 인연이 되고 마니."
이룰 수 없는, 정복되지 않는 꿈 하나를 간직할 때 어쩌면 더 행복할 수 있습니다. 밤하늘 별이 아름다운 이유가 그 별에 실제 가보지 못했기 때문이듯, 고백도 못한 짝사랑이 더 오래 가슴에 남듯 말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원하는 걸 가졌을 때의 기쁨이 예전만큼 오래가지 않더군요. 욕망은 화려한 무언가를 소유하게 만들지만 다시 더 큰 자극을 찾아가게 만듭니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를 정복한 등반가의 환희는 분명히 클겁니다. 그러나 정상에 영원히 머무를 수 없기에 등반가는 산 아래 가장 낮은 땅으로 다시 내려와야 합니다.
한잔에 500만원짜리 로마네 콩티를 마셔본 지인께 감흥을 여쭤봤더니 이렇게 답하시더군요.
"화려하고 우아하고 섬세한, 완벽에 가까운 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돈을 내고 다시 마셔보고 싶지는 않아요. 대신 싸고 훌륭한 와인 수백병을 사서 부담없이 친구들과 마시고 싶습니다. 그게 더 편하고 좋더라구요."
파텍 필립 시계를 차고 람보르기니를 몰면서 로마네 콩티 와인을 마셔야만 삶이 행복한 건 아닙니다. 람보르기니든 국산 경차든 꽉막힌 서울 강변북로에 기어가기는 매 한가지이니까요.
그러니 여러분 1~2만원짜리 싼 와인 마신다고 기죽지 마세요.(^^)
p.s. <우리의 와인>에서 전해드리는 오늘의 노래는 김민기의 '봉우리'입니다. 이번 칼럼과 가장 잘 어울리는 노래라고 생각합니다.
글·사진=한경닷컴 김민성 기자 mean@hankyung.com 트위터 @mean_R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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