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첫 미슐랭 2스타 등극 뉴욕 '정식' 설립자 임정식 셰프를 만나다
'전세계 트렌드의 심장' 뉴욕서도 통한 가장 한국적인 '정식'의 성공비결
끝모를 불황의 터널에서도 남다른 노력과 혁신,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우뚝 선 성공기업들의 숨은 이야기로 독자들을 찾아갑니다. 한경닷컴 산업경제팀 기자들이 취재현장에서 발굴한 기업들의 생생한 성공스토리는 독자 여러분들에게 도전과 위로가 되어 드릴 것입니다. <편집자 주>
지난 10월 1일 한국 푸드&다이닝(Food&Dining) 계에 '낭보'가 날아들었다.
전세계 다이닝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하는 미슐랭이 발표한 2014년 미국 뉴욕판 가이드에서 한국인 임정식(35·사진) 셰프가 이끄는 한식 레스토랑 '정식(JUNGSIK)'이 2스타를 받은 것이다. 이는 다양한 '최초' 기록이다. 한국인 셰프가 받은 첫 미슐랭 2스타이자, 프랑스·이탈리안 등 주류 다이닝 음식이 아닌 한식 전문 식당이 받은 첫 별점 2개이기도 하다.
전세계 트렌드의 심장이자 각국 요리들이 맛을 뽐내는 다이닝 각축장, 미국 뉴욕 한식당 받은 2스타라는 점도 의미가 크다. 이는 한식이 파인다이닝(Fine Dining)으로서 세계적인 인정을 받을 수 있음을 보여준 첫 사례에 가깝다. 또 주목할 점은 35살 젊은 셰프가 이 식당을 이끈다는 점이다. 뾰족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 '한식의 세계화'라는 해묵은 과제에 이 젊은 한국인이 돌파구를 마련해 줄 수 있다는 기대가 높아지는 이유다.
임 셰프를 '운 좋게' 한국에서 만났다. 운이 좋은 이유는 그가 일년 중 대부분을 뉴욕 맨해튼 트라이베카에 위치한 '정식'에서 보내기 때문이다. 1년에 2달 정도만 한국에 머문다. 귀국해도 뉴욕 '정식'의 출발점이자 고향집인 서울 강남 신사동에 있는 '정식당'에 머물거나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새로운 맛을 찾는다. 이날도 국내 일정을 쪼개 새로운 식재료를 찾기 위해 지방에 다녀온 길이라고 했다.
◆ 한국인 셰프가 이끄는 뉴욕 한식식당 '미슐랭 2스타'에 오르다
"축하한다"는 말부터 건냈다. 임 셰프는 "감사하다"면서도 꽤 쑥쓰러워했다.
올해 뉴욕에서 미슐랭 2스타를 받은 레스토랑은 정식을 포함해 5곳이다. 뉴욕에서 가장 '핫'한 인기 레스토랑으로 꼽히는 아테라, 마레아, 모모푸쿠 코, 소토 등과 2스타의 어깨를 나란히했다. 게다가 미슐랭 1스타에서 2스타로 1년만에 승격된 곳은 이들 5곳 중에서도 '정식'이 유일했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한식 레스토랑이 가장 성장세가 빠른 '뉴욕 톱5' 식당에 든 셈이다.
"미슐랭 가이드 관계자들이 식당에 왔다 갔는지도 몰랐습니다. 전화라도 좀 주고 오지(웃음). 1스타를 받은 뒤 1년동안 새로운 메뉴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동시에 기존 메뉴들을 업그레이드했어요. 식재료, 양념, 조리 방법 등을 다양화하고, 디테일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음식과 와인 등 음료 간 마리아주(marriage·궁합)를 높이기 위해 수석 소믈리에와도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음식의 맛과 품질만큼이나 서비스 수준 역시 식당의 격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미슐랭 가이드는 국내에서 미쉐린으로 더 많이 알려진 프랑스 타이어 회사 미슐랭(Michelin)이 매년 발간하는 전세계 레스토랑 평가서다. 1900년부터 타이어 구매 고객에게 무료로 나눠주던 자동차 여행 안내책자에서 출발했다. 별 수로 등급을 표시하는데 3개가 가장 높은 등급이다. 기준은 음식 자체 뿐만 아니라 페어링(pairing)되는 와인 등 음료의 품격 및 독창성, 음식을 선보이는 직원들의 서비스 마인드, 식당 청결상태 등을 종합 평가한다. 물론 정확한 세부 기준은 비밀에 부쳐져있다.
미슐랭은 1933년부터 전세계 식당을 '기습' 방문해 별점을 매기기 시작했다. 미슐랭 1스타는 ‘해당 가격대에서 매우 좋은 음식을 만드는 식당'이란 뜻이다. 2스타는 '해당 국가 여행을 가면 차를 돌려서라도 가볼 만한 식당' 급이다. 가장 높은 3스타는 '이 식당을 방문하기 위해서라도 그 국가를 여행하라'는 뜻일만큼 해당 레스토랑에 독보적인 가치를 부여한다.
◆ '캐주얼' '로컬' '와우' 뉴욕서도 통한 가장 한국적인 성공 비결
정식의 메뉴 구성을 일단 들여다보자. 한국 정식당과 뉴욕 정식의 메뉴는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2013 가을 메뉴' 어뮤즈(amuse·고객을 환영한다는 뜻으로 내는 에피타이저)는 특이하게도 닭강정이다. "고급 레스토랑에 웬 서민 음식 닭강정?" 같은 의구심이 일기 시작한다.
해장국도 등장한다. 우리네 순대국밥마냥 돼지 진하게 우린 칼칼한 육수 속에 밥이 들어있다. 국밥같은 해장국 위에는 한국 대표 서민 음식 삼겹살 구이가 올려져있다. 부산 돼지국밥 맛이 떠오른다. 정식의 대표 메뉴로 자리잡은 성게 비빔밥도 그렇다. 경남 통영이나 전남 해안가 식당에서 먹던 그 토속적인 맛이다. 녹진한 성게알(우니)의 풍미와 고슬한 밥의 식감이 어우러진다. 이름이 페이스북의 심볼 '좋아요'인 요리에는 구운 옥돔에다 참기름 띄운 북엇국 소스를 부어준다. 몸 속 숨은 술독까지 풀어주는 듯 맑고 깊은 우리네 부엇국이다.
디저트 이름은 '이맘때쯤 합천은'(경남 합천이 고향인 디저트 담당자 의 아이디어)이다. 장독대 모양의 초콜릿 위로 토란잎이 우산처럼 서있다. 장독대를 비에 젖지 않게 해준 토란잎 위에는 이슬 2방울이 맺혀있다. 계절별로 조금씩 다른 구성으로 동심을 자극하는 '이맘때쯤 합천은'만큼이나 인기를 끈 디저트는 '프티 푸르(petit-four)'다. 프티 푸르는 프랑스말로 한입 크기의 쿠키를 뜻한다. 주인공은 '담배 꽁초' 쿠키다. 한국 애연가들은 담배를 '식후땡'이라고 했던가. 밥 다 먹고 한대 피워야 한끼 식사가 마무리된다는 인식. 임 셰프에게는 담배도 한국적 디저트인 셈이다.
임 셰프의 메뉴들은 '한국적인, 너무나 한국적인' 소재다. '한식 세계화'라는 슬로건 속에 으레 자주 등장하는 격조높은 궁중 음식이 아니다. 한국인들이 평범한 일상(캐주얼·Casual)에서, 고속버스 휴게소에서 혹은 술 해장용 국밥집에서 자주 먹는 흔한 '길거리 음식(로컬·Local)'이다. 또 우리네 어릴적 동심과 추억을 되새기게 하는 소재들을 빛바랜 옛사진마냥 접시 위에 올려놓는다. 담배도 우리네 직장인들의 가난한 디저트라고 재기발랄하게 이야기한다.
우리 삶과 가장 밀접한 음식을 일상에서 찾아 생명력 있는 맛으로 재탄생시킨게 정식의 성공 비결이라고 임 세프는 요약했다.
"기자님은 혹시 궁중전골 같은 궁중요리 많이 드셔보셨어요? 한국인도 먹을 일 그닥 없잖아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에는 공감합니다. 중요한 건 '가장 한국적인 것'은 그저 우리 주변에 있다는 거죠. 임금님이나 양반들이 먹던 것들이 아니라요. 파인 다이닝의 핵심 중 하나는 문화입니다. 그 나라의 문화는 우리가 살아가는 그 모습 그대로예요. '치맥(치킨과 맥주)' 단골 메뉴인 닭강정, 술로 아픈 속을 풀어주는 해장국, 통영에서 먹었던 성게 비빕밥, 토란대로 비를 피하던 옛 시절, 그리고 밥 먹은 뒤 피우는 담배 한대. 정작 우린 이런 맛에 익숙하니까 대단한지 몰라요. 그런데 외국인 입에서는 '와우(Wow)'라는 감탄이 나오는 그런 맛들입니다. 기본적으로 '맛있는 것'은 미국인이나 한국인에나 동일하다고 생각해요. 그게 가장 한국적이고 세계적인 것이지요."
◆ "앞으로 목표요? 당연히 미슐랭 3스타 받아야죠~"
뉴욕 정식의 성공에는 우여곡절도 많았다. 임 셰프는 22살 군대 취사병으로 뒤늦게 요리를 시작했다. 제대 뒤에도 이 분야, 저 분야로 방황도 많았다. 2006년 미국 요리학교인 뉴욕주 CIA를 졸업한 뒤 업(業)으로 다이닝계에 뛰어들었다. 2011년 뉴욕에 정식을 낼 때까지 프로 요리 경력은 채 5년도 안됐다.
2009년 한국에 정식당을 차려놓고 불과 2년만에 세계 요식업계의 심장에 도전장을 던진 셈이었다.
국내에서도 들었던 '무모한 도전'이라는 평가는 뉴욕에서도 그치지 않았다. 현지 언론매체는 '음식에 비해 가격이 너무 비싸다' 같은 혹평을 하기도 했다. 지난해 여름은 정식에 최악의 시기였다. 미국 휴가 시즌 특성상 여름 손님이 적기도 하지만 장사가 안되도 너무 안됐다. 하루 2테이블 손님이 들까말까한 때였다.
역시나 '무모한 도전'이었나 자책하고 있을 무렵. 마침내 지난해 10월 미슐랭 뉴욕가이드가 발표됐다. 정식이 1스타로 미슐랭에 입성했다. 식당 문을 닫아야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낄 무렵 하늘이 준 반전이었다. 그러나 하늘은 또 다른 시련을 보냈다. 같은달 대형 태풍 샌디가 미국 동부를 휩쓴 것이다. 뉴욕을 포함한 미 동북부 650만가구가 정전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오바마 정부는 급기야 뉴욕 시민에 일부 대피령까지 내렸다. 1스타 등재 기쁨도 잠시 임 세프는 다시 한달간 식당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다.
'참 복도 없다'는 한숨과 함께 한달 뒤 문을 열자 의외로 손님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미슐랭 등재 소식과 함께 1년 넘게 갈고 닦은 정식의 맛이 입소문을 타면서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전체 50테이블이 가득 차기 시작했고 주말에는 2차례 예약 회전을 시켜야할만큼 손님이 늘었다.
"지금 생각해도 뉴욕 진출은 참 도전적이었어요. 식당 입지부터 행정 등록, 인테리어, 가스 설치 등등 모든 일을 제손으로 했습니다. 식당이 잘 안될때는 그래서 더 힘이 빠졌죠. 저를 믿고 여기까지 와준 직원들에게도 많이 미안했습니다. 그래도 뉴욕에 진출할 수 있었던 건 제 요리는 한국이 아닌 해외에서 더 빛을 발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어요. 분명히 외국인들도 일상적인 한국의 맛들을 좋아할 거라는 예감. 그리고 그 맛은 누구보다 제가 잘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믿음. 그런게 통했던 것 같습니다. "
마지막으로 임 쉐프에게 앞으로의 목표를 물었다. 인터뷰 내내 장난끼 가득한 소년같은 얼굴로 시원시원하게 말을 잇던 그였다. 즉답이 돌아온다.
"내년에 당연히 3스타 받아야죠(웃음). 못받을 이유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켜봐주세요."
글= 한경닷컴 김민성 기자 mean@hankyung.com 트위터 @mean_Ray
사진= 한경닷컴 변성현 기자 byun8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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