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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의 인물] 에디슨 "내가 발명을 하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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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 문화의 가교 한경



“나는 발명을 하기 위한 돈을 벌기 위해 발명을 계속한다.”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은 뛰어난 발명가인 동시에 사업가였다. 2000건이 넘는 특허를 활용해 ‘에디슨 전기그룹’을 일궜다.

에디슨은 1847년 미국 오하이오주 밀란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지나친 호기심과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증세로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닐 수 없었다. 어머니의 극진한 ‘홈 스쿨링’은 에디슨의 학습능력은 물론 경제적 자립능력까지 키워줬다. 기차 화물칸에 숨어 각종 실험을 하던 에디슨은 1862년 남북전쟁 중 신문을 사다가 인쇄해 되파는 방식으로 적지 않은 돈을 벌었다.

차에 치일 뻔한 역장의 아들을 구해준 일로 철도 전신수가 되면서 그의 능력은 꽃을 피우게 된다. 7년간의 전신수 시절 익힌 기술로 1869년 전기투표기를 개발, 전업 발명가의 길로 들어섰다. 1872년 이중전신기, 1876년 탄소전화기, 1877년 축음기에 이어 1879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 중 하나로 꼽히는 백열전구 상용화에 성공했다. 그는 곧이어 발전·송전·배전·전선 회사를 잇따라 설립하면서 ‘에디슨 전기제국’을 세웠다.

그러나 무리한 사업 확장에 발목이 잡혔다. 자금난 속에 10년간의 백열전구 특허 소송까지 이어지면서 위기를 맞았다. 이 틈을 파고든 ‘금융왕’ J P 모건의 경영 개입으로 기업 일선에서 물러나야 했다.

에디슨은 가족에겐 냉혹한 가장이었다. 두 번의 결혼을 한 그는 연구를 이유로 부인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1931년 10월18일 에디슨이 타계한 날, 미국 전역은 1분간 전등을 꺼 그를 추모했다.

백승현 기자 argo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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