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에선 졸속입법 논란이 거의 없다. 나라마다 특징은 다르지만 오랜 민주주의 역사와 의회 정치 경험을 통해 저마다 부실 입법을 걸러내는 감시 장치를 마련한 덕분이다.
독일의 경우는 한국에도 시사점이 많다. 독일 연방의회는 ‘3독회(讀會)+위원회’ 심사 체제를 통해 부실 입법을 걸러낸다. 3독회란 발의된 법안에 대해 본회의에서 세 번 논의를 거친다는 의미다. 1독회는 법률안에 대한 총론적 심의 과정이다. 대강의 내용을 토의한 뒤 법률안을 어느 상임위원회에 회부할지 결정한다. 표결은 없다.
1독회가 끝난 법안은 상임위에 회부된다. 상임위는 법률안 심의를 담당한다. 심사 결과는 연방의회에 보고되고 이를 토대로 본회의에서 2독회가 진행된다. 심의가 끝나면 표결이 이뤄진다.
이를 토대로 3독회가 이어진다. 3독회에선 2독회에서 수정 의결된 규정들에 대해서만 다뤄진다. 법률안 수정 제안은 교섭단체나 연방의회 의원 5% 이상의 요구가 있을 때만 가능하다. 3독회 후엔 최종 표결이 이뤄지고 여기서 가결되면 법률안이 통과되는 게 일반적이다. 법안 하나가 만들어지기까지 이런 ‘크로스 체크’ 과정을 거치는 만큼 의원들도 법안 제출에 신중할 수밖에 없다.
김상겸 동국대 법과대학 학장은 지난 8월27일 한국입법학회 등의 주최로 열린 ‘국회 의원입법 제도의 발전 방안’ 토론회에서 “(한국에서도) 법률안의 위원회 심사과정에서는 독일의 위원회 심사처럼 3독회 이상을 정례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미국은 상임위원회가 불필요한 법안을 걸러내는 ‘깔때기’ 역할을 한다. 의원들이 낸 법안들은 한국의 감사원에 해당하는 회계감사원(General Accounting Office)이 엄밀하게 분석해 그 결과를 상임위에 제출한다. 상임위는 이 자료를 바탕으로 가치 있는 법안을 고른다. 이 단계에서 발의된 법안의 90%가량이 폐기된다. 서류 심사 단계부터가 까다로운 셈이다.
영국은 전문적인 규제개혁 기구를 의회 내에 두고 있다. 새로운 규제 법안이 쉽게 통과되지 못하는 구조다. 정부 각 부처에는 규제심사국이 있고 상·하원에는 규제 개혁을 전담하는 위원회가 활동한다. 캐나다도 규제 점검을 위한 상·하원 합동협의회를 설치해 규제 법안을 집중 검토하고 있고 네덜란드 행정부담자문위원회, 스웨덴 규제철폐위원회도 규제 법안의 타당성을 꼼꼼히 따지고 있다.
프랑스 스위스 등은 10여년 전부터 입법영향평가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법안이 국민들에게 미치는 다양한 영향과 비용을 비롯해 법안의 실효성과 부작용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시스템이다.
○특별취재팀 = 손성태 차장, 김재후 이태훈 기자(이상 정치부), 주용석 차장대우, 런던·스톡홀름=김주완 기자(이상 경제부), 이태명 기자(산업부), 장진모 워싱턴·안재석 도쿄 특파원, 남윤선 기자(이상 국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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