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만난 재계 인사는 우리 산업계 현실을 ‘SOS’로 표현했다. 경제성장 속도가 느려졌고(slow), 고령화(old)가 심해지고 있으며,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sandwich) 시장을 빼앗기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간단한 통계로 쉽게 알 수 있다. 2003~2012년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3.61%로 같은 기간 세계 경제성장률(3.83%)보다 낮았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007년(2만1590달러) 처음 2만달러를 넘어선 뒤 5년째(2012년 2만3113달러, IMF 발표 기준) 거북이 걸음을 하고 있다. 일본과 스웨덴은 5년 만에 2만달러에서 3만달러로 갔고, 독일은 4년 만에 도달했다.
위협받는 기업생태계
지난 50년간 한국의 주요 산업구조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10대 산업에서 1위(매출 기준)인 기업들의 평균 나이(창립 기준)는 54세로 늙어가고 있다. 삼성전자, LG전자, 포스코, 현대중공업, SK에너지 등이 창립 50년을 넘겼다. 업종 분포도 제한돼 편중이 심하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천이 선정한 글로벌 500대 기업 명단에 미래 유망분야로 꼽히는 군수·항공·엔터테인먼트·제약 부문에서는 한국 기업이 명함을 못 내민다. 미국은 직업 종류가 3만개인 데 비해 한국은 1만개다. 직업이 100개만 늘어도 10만명이 새 일자리를 찾게 된다고 한다.
한국의 고령화 속도도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빠르다. 2000년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7%를 넘어 고령화사회로 접어든 한국은 2018년 고령사회(14%), 2026년엔 초고령사회(20%)에 진입할 전망이다. 한국 기업들은 중국의 추격과 엔저(低)에 힘입은 일본 업체들의 가격경쟁력 회복으로 인해 고전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에 따르면 한국과 중국의 기술 격차는 2010년 2.5년에서 지난해 1.9년으로 좁혀졌다.
이런 현상이 지속되면서 한국 기업의 생태계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 한국은 대기업은 ‘희박’하고 중견기업은 ‘약’하며 중소기업은 ‘지나치게 많은’ 압정형 구조를 갖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따르면 상시 근로자 1000명 이상인 국내 대기업은 전체의 0.2%(2010년 기준)에 불과하다. 미국은 이 비율이 1.9%, 일본은 0.6%, 독일은 0.8%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와 정치권은 ‘약자 보호’를 명분으로 중소기업 우대 및 대기업 규제 정책만 쏟아내고 있다.
국내 대기업 비중 0.2% 그쳐
재계에서는 올 들어 유독 경영난에 시달리는 대기업들이 많다고 말한다. STX그룹이 구조조정에 들어갔고 동양그룹은 자금난으로 위기를 맞았다. 30대 그룹 안에서도 업황 악화와 실적 부진에 시달리는 기업들이 적지 않다. 유동성 위기 및 부도 가능성이 높은 기업들의 영문 이니셜을 딴 명단(‘3D 1S’)까지 나돈다.
기업가 정신을 보여줬던 샐러리맨 신화도 연달아 빛이 바래고 있다. 박병엽 팬택 부회장이 실적 악화에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했다. 강덕수 STX그룹 회장은 채권단에 등이 떠밀렸고,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도 퇴진했다.
대기업을 키우자는 목소리가 사라진 지 오래다. 이런 상태로는 산업계의 ‘SOS 현상’이 점점 심해질 수밖에 없다. 소규모 기업이 갈수록 늘어나는 가운데 현재도 ‘희귀한’ 대기업이 줄어드는 상황이 지속되면 양질의 일자리와 투자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정부와 정치권이 ‘경제민주화’로 포장된 각종 규제로 힘들어하는 대기업들이 보내는 SOS(조난 신호)에 좀 더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이건호 산업부 차장 leek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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