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백 좀…" 못이겨 받은 부탁…세관에 딱 걸려 '블랙리스트' 오명
출장턱 내랴 선물 챙기랴…관광도 아닌데… "아~ 내 돈"
새벽 귀국에 잠도 못잤는데 "출근해" 한마디에 폭풍 피로
“아이고! 잘 먹었다. 이건 입맛에 잘 맞네. 정 대리, 저녁엔 어디 가면 되나?”
미국 뉴욕 한식당에서 이쑤시개로 잇속을 쑤시며 던지는 이 부장의 한마디에 정 대리는 또 한번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정 대리는 뉴욕에서 대학을 나온 유학파라는 이유로 상사들이 해외 출장 때마다 데려가는 ‘소중한 후배’다. 하지만 매번 현지 맛집과 밤문화 명소(?)까지 콕 찍어 안내하는 일은 정 대리에겐 만만찮은 스트레스다.
미국 출장이 벌써 일곱 번째지만 정 대리는 대학 시절 친구들 얼굴 한번 보지 못했다. 상사들이 그를 ‘현지 가이드 겸 통역사’로 늘 붙잡아놓기 때문이다. “동료들에게 이런 고충을 털어놔봤지만 ‘회사 돈으로 마일리지까지 쌓으면서 배부른 소리 한다’고 해요. 저에게 출장길은 고생길이라고요.”
○출장이 아니라 ‘해외구매 대행’
취업준비생들에겐 해외 출장이 잦은 직종은 일종의 로망일 수 있다. ‘글로벌 인재’의 표상이니 말이다. 하지만 막상 해외 출장을 자주 다녀보면 “이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더라”는 게 당사자들의 하소연이다.
한 전자회사의 기획마케팅팀에는 ‘출장턱’이라는 전통이 있다. 아시아든 유럽이든 출장을 다녀온 사람은 무조건 팀원들에게 저녁을 사야 하는 암묵적 규칙이다. 1년에 서너 번 출장을 가는 김 대리에겐 이게 골칫거리다. 팀원 10명에게 밥과 술을 사면 1인당 2만원만 잡아도 20만원. 사흘치 출장비(하루 7만원)가 날아간다. “출장이 관광도 아니고, 이것저것 챙길 게 많은데 돈까지 써야 하니 ‘이런 걸 왜 하나’ 싶어요.”
선후배에게 줄 선물을 챙기는 일도 만만치 않다. 안목과 입맛은 어찌 다들 이렇게 고급스러워진 건지. 대충 골랐다간 “김 대리, 너무 신경 안 쓴 것 아냐?”라는 ‘악플’이 줄줄이 달려온다고. “해외 나가는 게 흔치 않았던 1980년대도 아니고 출장턱이나 선물 같은 건 없애도 되는 것 아닙니까?”
1년에 두어 번 유럽 출장을 가는 중견기업의 장 과장은 동료들에게 ‘해외구매 대행’ 서비스를 하느라 진이 빠진다. 현지 가격이 국내보다 저렴한 명품 브랜드 제품을 “대신 사다달라”는 부탁이 출장 때마다 꼭 들어오기 때문. 물건을 사는 데 들이는 발품과 시간도 아깝지만, 문제는 늘 귀국 후 인천공항 세관에서 터진다. “동료들이 구매를 부탁한 명품백을 몰래 넣고 왔다가 걸려서 세금을 문 게 벌써 세 번이나 돼요. ‘블랙 리스트’에 올랐는지 요새는 세관에서 툭하면 저를 부른다니까요.”
○“새벽에 귀국했지? 그럼 출근해”
백화점 명품 담당 상품기획자(MD)들은 해외 명품을 보러 외국에 나갈 일이 많다. 그런데 명품 MD들 사이에선 출장의 인기가 예전같지 않다고 한다. 과거엔 귀국 시간이 오전이라 하더라도 그날은 쉬고 다음날 출근하는 게 관례였다. 하지만 업무 강도가 세지면서 요즘은 귀국 당일 정상 출근하는 일이 다반사다. 특히 동남아 출장은 도착 시간이 새벽인 경우가 많아 ‘기피 대상 1호’로 통한다.
명품 MD 3년차인 A 대리의 전언. “비행기에서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출근하면 업무 강도는 두 배가 돼요. 예전엔 해외 방문이 ‘꿀출장’이었다는데…. 요즘은 전혀요!”
혼자 가는 출장은 힘이 들어도 그나마 낫다. 업무상 ‘갑(甲)’을 모시고 가야 하는 해외 출장은 스트레스가 두 배다. 대기업에 다니는 박 부장은 올봄 협력업체의 VIP들을 데리고 미국 전시회 출장을 갔다가 황당한 일을 겪었다. VIP 가운데 두 명이 입국 거부를 당한 것. 9·11 테러 이후 미국 입국 심사가 까다로워진 건 박 부장도 잘 알고 있었지만 일행이 입국 거부를 당한 것은 처음이었다.
함께 밤을 새운 뒤 다음날 한국행 비행기에 VIP를 태워 보냈다는 박 부장은 “시차 적응도 안 된 상태에서 쪽잠을 자야 했다”며 “4박5일 출장 내내 피로에 쩔어 죽는 줄 알았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난생 첫 해외 출장에 ‘폭풍 설사’
가전업체에 근무하는 강 대리는 작년 말 인도에 출장갔다가 배탈로 고생한 ‘굴욕의 흑역사’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는 회사 해외연구소에서 일할 현지 인력을 채용하기 위해 7박8일 일정으로 인도를 찾았다. 입사 후 첫 해외 출장이라 한껏 들뜬 강 대리. 그러나 벵갈루루공항에 내린 후 출출한 배를 채우기 위해 근처 식당에서 간단한 음식을 시켜먹은 게 화근이었다. 음식을 먹은 뒤부터 배가 살살 아파오더니 ‘폭풍 설사’가 시작된 것.
강 대리는 면접시간에도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려야 했다. 화장실을 불결하게 여기는 인도 특유의 문화 탓에 이런 강 대리의 모습은 현지 직원들에게 밉상으로 찍혔다. 결국 귀국 후 평소 맡고 있던 인도 연구소 인력 관리에서 손을 떼야 했다고. “인도에 가면 음식을 조심해야 한다던데 새겨 들을 걸 그랬어요. 아! 정말 내가 싫다.”
삼성전자 마케팅팀 B 대리는 최근 처음 유럽 출장을 갔다가 갑작스런 ‘칵테일 파티’에 크게 당황했다. 이 지역에서는 손님에게 웰컴 파티를 열어주는 일이 많고, 이때 근사한 드레스까진 아니어도 깔끔한 재킷이나 원피스를 입어주는 것이 예의라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호텔 주변 백화점을 뛰어다니다 패스트패션(SPA) 매장인 ‘망고’와 ‘자라’에서 10달러짜리 원피스를 겨우 찾아 위기를 모면했죠. 휴….”
○집 떠나면 개고생
해외에 나가보면 온몸으로 깨닫게 된다. 한국 항공사나 호텔 서비스가 ‘세계 최정상급’이라는 것을. 면세점에서 일하는 박 과장은 지난 1월 스위스에서 열리는 명품 박람회에 갔다가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는 말을 실감했다. 당시 유럽의 기록적인 폭설로 곳곳의 공항이 마비됐고, 독일에서 환승해야 할 스위스행 비행기가 결항되면서 악몽은 시작됐다. “언제 뜰지 알 수 없는 환승편을 기다리며 공항에서 혼자 날밤을 새웠죠. 직원들에게 물어봐도 무뚝뚝한 표정으로 ‘모른다’고만 하는데 서럽기까지 하더라고요.”
더 큰 문제는 수하물이 ‘통째로 실종’된 것. 눈이 그친 다음날 오후 스위스에 몸만 달랑 도착한 박 과장은 수하물이 독일에서 아직 오지 않았다는 답변을 듣고 경악했다. “짧은 영어로 항의해봐도 ‘내 잘못이 아니다’고 하는데.
아, 진짜… 유럽 공항 직원들 최악이에요!”
임현우/전설리/박신영/황정수/강경민 기자 tardi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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