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미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작품 한 점을 꼽으라면 어떤 것을 들 수 있을까. 2004년 12월 런던에 모인 영국의 대표적 미술가와 미술사가 500명은 이구동성으로 마르셀 뒤샹(1887~1968)의 ‘샘(Fountain)’을 꼽았다. 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인들’은 2위로 자존심을 구기고 말았다.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의 ‘마릴린’은 3위를 차지했다. 현대미술의 문외한들은 “아니 대체 ‘샘’이 어떤 작품이야. 뒤샹이란 친구는 누구지”라고 의문을 가질 게 틀림없다.
‘샘’은 1917년 뒤샹이 독립미술가협회전인 ‘앵데팡당’에 출품하기 위해 내놓은 작품으로 남성용 소변기 위에 ‘R. Mutt’라고 사인한 것이다. 작가가 제작한 작품이라면 무엇이든 출품할 수 있다며 최대한 열어놨던 문호를 두고 독립미술가협회 회원들은 뒤샹의 작품이 예술이냐, 아니냐며 격론을 벌인 끝에 예술작품이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결국 전시조직위원회는 뒤샹의 작품을 전시실에서 철거해버렸다.
시중에서 돈만 주면 구할 수 있는 기성 제품(ready-made object)을 가져다 사인만 덧붙인 후 작품이라고 주장한 것은 작가의 창조적 작업을 중시하는 전통 예술에 대한 전면적 도전을 의미했다. 그는 창작에서 중요한 것은 완성작품보다 그것에 대한 구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작가가 직접 자기 손으로 작품을 만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며 중요한 것은 작가가 물체를 선택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피카소가 형상을 해체하고 마티스가 색채의 고유성을 부정했지만 미술은 작가의 손으로 창조된다는 전통적 개념 자체를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뒤샹은 개념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꿔버렸다. 미술은 작가의 손때가 묻었느냐, 안 묻었느냐 하는 문제보다 얼마나 기발한 상상력과 독창적 아이디어를 제시했느냐가 중요하게 된 것이다.
그의 이런 생각은 1919년 모나리자 복제화를 구입해 그 얼굴에 수염만 살짝 그려 넣은 후 ‘L.H.O.O.Q’라는 제목을 붙인 데서도 잘 드러난다. 이 다섯 자의 알파벳은 프랑스어로 ‘엘라쇼오퀼(Elle a chaud au cul)’과 발음이 같아 ‘그녀의 엉덩이는 뜨거워’라는 뜻이다. 얼핏 보기에는 무슨 심오한 뜻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그는 미술품이란 그것이 생산된 시대의 고유한 의미를 담고 있게 마련이고 이것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데도 사람들이 옛 작품을 마치 신주 모시듯 숭배하는 세태를 풍자한 것이다. 그는 이런 명품 숭배행위를 종교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노르망디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뒤샹은 자유롭고 예술적인 가정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그런 그에게 판에 박힌 이론을 강요하는 미술학교의 교육은 맞지 않았다. 1904년 몽마르트르에 자리잡고 아카데미 쥘리앙에 등록했지만 흥미를 느끼지 못해 매일 당구장으로 출근하다시피 했다. 그런 그가 전통 미술에 반기를 든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가 예술 전복자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뉴욕으로 이주해 다다이즘 운동에 가담한 1913년부터다. 그해 뒤샹은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를 아모리 쇼에 발표했는데 사물을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본 뒤 이것을 한데 결합하는 피카소의 입체파 기법을 채용, 여기에 운동감을 더한 이 그림은 비평가들로부터 “추잡한 누드”라는 혹평을 받았다.
그러나 한창 아방가르드의 기수로 활동하던 뒤샹은 1923년께 미술판에서 자취를 감춘다. 기행을 일삼던 그는 또 한번 기행을 저질렀다. 놀랍게도 그는 체스선수로 변신해 주위를 아연케 했다. 뒤샹의 뜬금없는 행동에 기가 막힌 첫째 부인은 남편의 작품들을 널판지 위에 아교로 덕지덕지 붙여버렸다고 한다. 체스올림픽에 출전해 세계 챔피언이 되겠다는 엉뚱한 야망을 품은 뒤샹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그럴 재능이 없다는 걸 깨닫고 이번에는 체스 비평가가 된다. 그는 “모든 예술가가 다 진정한 예술가는 아니지만 체스꾼은 모두 진정한 예술가”라고 떠벌렸다.
뒤샹이 활동한 기간은 짧았지만 그가 현대미술에 끼친 공로는 피카소 뺨칠 정도다. 초현실주의, 팝아트에서부터 개념미술에 이르기까지 현대미술의 다양한 사조는 모두 전통미술의 알 껍데기를 깨고 나온 뒤샹에게 크게 빚졌다고 할 수 있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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