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그것은 동시에 객관적 원리로서, 최상의 실천 근거인 이 원리로부터 의지의 모든 법칙이 도출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 실천 명령은 다음과 같은 것일 것이다 - 너는 너 자신의 인격과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 있어서 인간성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간주하여야 하며, 결코 단순한 수단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칸트 <윤리형이상학의 정초>
인간을 수단화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하라. 이 유명한 말의 주인공은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입니다. 철학자인 그는 1724년 독일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나 1804년 그곳에서 사망했습니다. 그의 출발은 사실 조금 초라했습니다. 젊은 시절 <활력의 참된 측정에 관한 이론들>이라는 논문을 야심차게 발표했지만, 돌아온 건 비웃음뿐이었습니다. 시인 레싱(G.E.Lessing)은 “칸트는 힘든 일을 하고자 하네/온 세상을 가르치려 하네/살아 있는 힘들을 측정하려 하나/자기 자신의 힘만은 측정하지 않네”라는 시까지 지어 칸트를 조롱했습니다. 분수나 알라는 말이었죠. 대학 교수도 46세라는 늦은 나이에 됐습니다. 그런데 대기만성이라고 할까요. 57세에 쓴 <순수이성비판>을 시작으로 그는 인생의 마지막 20여년간 놀라운 성취를 이룹니다.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 등의 기념비적인 저작이 이 시기에 쏟아져 나옵니다. 죽을 무렵 칸트는 이미 전설적인 존재가 돼 있었습니다.
‘무한도전’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연예인 노홍철 씨는 밝고 사교적인 성격과 더불어 세심하고 꼼꼼한 정리정돈으로 유명합니다. 비교하자면 칸트도 그와 비슷한 사람이었습니다. 의외로 사교술이 뛰어나고 유머감각도 좋았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소심할 정도로 정리 벽이 심했습니다. 책상과 의자, 가위나 주머니칼이 평상시 위치에서 조금만 벗어나 있어도 불안해 어쩔 줄 몰라 했으니까요. 시간 관리도 철저했습니다. 그는 새벽 4시55분에 일어나 홍차 두 잔과 파이프 담배로 아침을 대신하고 오전 7시부터 두 시간 동안 강의를 한 후, 오후 12시45분까지 집필 및 저술 활동을 했습니다. 오후 1시부터 세 시간 동안 친구들을 초대해 길게 점심을 먹은 후 오후 4시에 늘 산책을 했습니다. 산책 후에는 주로 여행기를 읽었고(칸트는 평생 쾨니히스베르크를 떠난 적이 없지만 동시에 엄청난 기행문 애독자였습니다. 그는 실제로 여행을 하는 것보다 기행문을 읽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밤 10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이 일과를 어긴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산책하는 칸트를 보고 시계를 맞추었다고 하니까요. 그렇다고 그를 소심한 ‘쫀쫀이’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흔히 철학은 칸트 이전과 칸트 이후로 나뉜다고 말합니다. 한 시대를 닫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 엄청난 정신의 힘을 지닌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칸트는 보기 드물 정도로 원대하고 심오한 정신의 소유자였습니다.
과연 ‘선’이란 무엇인가요? 서양철학에서 가장 흔한 대답은 행복이었습니다.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선이고, 선의 목적은 행복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칸트는 여기에 반대합니다. 선은 행복 혹은 쾌락과 근원적으로는 무관합니다. 왜 선을 행해야 하는가? 누군가 행복하기 위해서라고 답한다면, 칸트는 그가 진정한 도덕을 알지 못한다고 비판할 것입니다. 행복을 위한 도덕은 이기심의 다른 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철학자 김상봉은 <호모 에티쿠스>라는 책에서 칸트의 도덕이론을 설명하며 이렇게 덧붙입니다.
“도덕과 선행이 행복이라는 보상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은 앙드레 지드의 말처럼 순수한 도덕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모욕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 도덕의 가치는 행복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도덕은 그 자체로서 정당하며 그 자체로서 숭고합니다.”
칸트는 행복이나 쾌락을 주지 못한다 할지라도, 아니 그것 때문에 불행해지고 고통스러워지더라도 지키고 따라야 하는 고결한 가치가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절대적인 도덕 법칙입니다. 선한 행위란 그 도덕 법칙을 따르는 것입니다. 나에게 도움이 될지, 좋은 결과를 가져올지 등 이것저것 재고 따지며 하는 행동은 본질적인 의미에서 선한 행위가 될 수 없습니다. 나의 이익, 쾌락, 행복 등을 지우고 오로지 도덕 법칙 앞에 나를 세우는 일, 그리고 그 도덕 법칙을 따르기로 결단하는 일. 그것만이 우리를 선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칸트는 도덕법칙에 이렇게 찬탄하곤 했습니다.
“그에 대해서 자주, 그리고 계속해서 숙고하면 할수록, 점점 더 새롭고 점점 더 큰 경탄과 외경으로 마음을 채우는 두 가지 것이 있다. 그것은 내 위의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 법칙이다.” <실천이성비판>
문제는 도덕법칙이 종종 우리에게 자연적 본성을 거스르라고 명령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종일 굶었는데 마침 눈앞에 음식 1인분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연한 걸 묻지 말라고요? 그렇다면 만약 저 구석에 굶주려 쓰러진 아이가 한 명 있다면요? 선택이 쉽지 않을 겁니다. 내면에서 갈등이 시작됩니다. 배고픔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본능과 선의지가 격렬하게 부딪칩니다. 도덕적 명령은 이렇게 늘 인간을 싸움터로 이끕니다. 도덕 법칙과 우리의 본능적 욕구가 갈등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갈등이 꼭 나쁜 것은 아닙니다. 아니, 칸트는 오히려 이 갈등이 인간을 도덕적 존재로 만든다고 말합니다. 무슨 얘긴가요? 혹시 위로 올라가는 돌멩이, 배고픔을 참고 선을 베푸는 사자를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그럴 리 없습니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것은 자연법칙이나 타고난 본성을 따릅니다. 정해진 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다릅니다. 인간에게는 타고난 본성과 함께 그것을 거스르려는 힘도 있습니다. 내 배를 채울 것인가, 아이를 도울 것인가. 이런 종류의 갈등을 겪는 건 지구 상에 오로지 인간뿐입니다. 바로 이런 갈등에서 도덕의 가능성이 나옵니다. 갈등 끝에 당신은 아이를 돕든 음식을 먹든 할 것이고, 그 결과 도덕적 존재가 되든 되지 못하든 할 것입니다. 갈등을 모르는 동물에겐 ‘선’과 ‘악’이라는 단어는 필요 없습니다. 오로지 인간에게만 필요합니다.
그래서 칸트는 인간이 매우 특별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정해진 대로 행동하지 않고 자신이 선택한 대로 행동합니다. 인간은 도덕적 선택을 통해 정해진 본능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그리고 칸트는 이런 인간을 ‘인격’이라고 부릅니다. 인격은 다른 동물과 달리 자유를 누리며 선을 실천할 수 있는 고귀한 존재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래서 칸트는 다음의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 시대의 노래를 빌리자면, 사람은 꽃보다 아름답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그래서 사람은 언제나 목적이어야지 수단이 돼서는 안 됩니다. 다시 한번 칸트의 말을 들어볼까요?
“너는 너 자신의 인격과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 있어서 인간성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간주하여야 하며, 결코 단순한 수단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윤리형이상학의 정초 IV-429>
칸트를 읽으면서 우린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난 행복이나 유용성이 아니라 도덕적 명령을 따르고 있는가. 그리고 다른 사람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고 있는가. 그 대답 여부에 따라 우리는 ‘인격적 존재’일 수도 인격 이하의 동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김영수 S·논술 인문 대표강사 ysjad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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