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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의 인물] '한국 농업의 아버지' 우장춘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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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 문화의 가교 한경



대한민국 정부 수립 3년째였던 1950년 벽두부터 정부 산하 ‘우장춘 박사 환국촉진위원회’가 바빠졌다. 부랴부랴 호적을 만들어 보내는 등 우여곡절 끝에 3월 우 박사의 귀국이 이뤄졌다. 그가 도착한 부산항은 손 태극기를 흔드는 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쓰시마섬을 내준다고 해도 우장춘은 내줄 수 없다.” 당시 대한민국에 우 박사는 그런 존재였다.

‘한국 농업의 아버지’ 우 박사는 1898년 일본에서 태어났다. 을미사변에 연루돼 일본으로 망명한 우범선이 아버지, 어머니는 일본인 사카이 나카다. 아버지가 피살돼 절에서 자란 소년 우장춘이 농학과 인연을 맺은 것은 가난 때문이었다. 장학금을 받기 위해 들어간 도쿄제국대 농학실과(전문대학)를 1919년 졸업하고 농림성 산하 농사시험장에 취직해 1937년 퇴직 때까지 18년간 육종 연구에 몰두했다. ‘조선인’에 대한 멸시와 차별을 극복하고 1936년에 완성한 박사논문 ‘종(種)의 합성’은 일본은 물론 전 세계 농학계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서로 다른 종이 있음으로써 또 다른 종이 탄생할 수 있다는 이론으로, 다윈의 진화론을 이론적으로 보강한 논문이었다.

우리 정부의 끈질긴 설득과 본인의 결심으로 영구 귀국한 그는 초대 한국농업과학연구소장을 맡으며 ‘씨앗 독립’을 위한 숱한 업적을 남겼다. 강원도에 무균 씨감자를 보급해 전후 식량난을 덜었고, 제주에는 감귤 대량재배의 길을 열었다. 전국 도로변을 코스모스로 수놓은 것도 우 박사다. ‘씨 없는 수박’도 국내에 처음 소개했다.

우 박사는 일본에 두고 온 처자식을 그리워하며 살아야 했다. 모친상에도 출국허가를 받지 못해 한이 더 커졌던 탓일까. 악화된 위·십이지장궤양을 안고 떠난 출장길에 복통을 호소하며 입원해 세 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그의 나이 61세, 54년 전 오늘이다.

백승현 기자 argo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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