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단 40년 정호승 씨 11번째 시집 '여행' 출간
“사람은 때때로 자기 삶의 어느 한 순간을 스스로 기념하고 싶을 때가 있다. 이 시집은 지난해 한국 시단에 등단한 지 40년이 된 것을 스스로 기념하고 싶어서 내는 시집이다. 먼저 시에게 감사하고, 독자에게 감사하고, 나 자신에게 감사하고 싶어서다. 지금까지 나는 시가 있었기에 살아올 수 있었다.”
등단 40년 만에 열한 번째 시집 《여행》(창비)을 발표한 정호승 시인(63·사진)의 말이다.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가,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인은 이 시집에서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그 길에서 만났던 죽음과 역설, 그리고 희망을 일상적이지만 투명하게 빛나는 특유의 언어로 노래한다.
그는 최근 94세 아버지를 떠나보냈고 친한 친구와도 영영 작별했다. 죽음이라는 ‘여행’의 끝에 관해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시기였다.
“우리가 인생을 여행에 비유하는데, 저도 상당히 먼 여행을 해온 거죠. 이제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모퉁이를 돌아가고 있어요. 주변에서 하나둘 맞고 있는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깊게 인식하는 나이에 이르렀지요. 죽음의 징검다리를 생각하지 않고는 인생이라는 강을 건너갈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럼에도 그는 인생을 감사와 사랑으로 그린다. 그가 지난 인생을 돌아보며 감사하는 존재는 다름아닌 그의 손과 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맑은 정신을 시를 통해 길어올렸던 그와 어울리는 동반자다.
‘그동안 다른 사람의 가슴을 짓밟지 않도록 해주셔서/결코 가서는 안되는 길을 혼자 걸어가도/언제나 아버지처럼 함께 걸어가주셔서 감사합니다/싸락눈 아프게 내리던 날/가난한 고향의 집을 나설 때/꽁꽁 언 채로 묵묵히 나를 따라오던 당신을 오늘 기억합니다’(‘발에 대한 묵상’ 부분)
‘배가 고파 허겁지겁 밥을 먹을 때에도/길을 가다가 두 손에 흰 눈송이를 고요히 받을 때에도/손의 고마움을 고마워하지 못하고/하늘이 주신 거룩한 밥과/겨울의 희고 맑음에 대해서만 감사했습니다/(…)/하나가 필요할 때 두개를 움켜쥐어도/손은 나를 버리지 않았습니다’(‘손에 대한 묵상’ 부분)
표제작 ‘여행’에서 ‘사람이 여행하는 곳은 사람의 마음뿐이다/아직도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의 오지뿐이다’고 노래한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도 타인과의 공감이라는 시의 본질을 놓지 않는다.
‘나는 길가에 버려져 있는 게 아니다/먼지를 일으키며 바람 따라 떠도는 게 아니다/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당신을 오직 기다릴 뿐이다/(…)/오늘이 인생의 마지막이라고/길바닥에 주저앉아 우는 당신이/지푸라기라도 잡고 다시 일어서길 기다릴 뿐이다’
시인이 노래하는 것은 결국 ‘희망’이다. 때로는 죽음과 절망이 삶을 힘겹게 하지만 그래도 “인간이 저지르는 죄악 중에서 가장 큰 죄악은 희망을 잃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내 지금까지 결코 버리지 않은 게 하나 있다면/그것은 희망의 그림자다/버릴 것을 다 버리고/그래도 가슴에 끝까지 부여안고 있는 게 단 하나 있다면/그것은 해질녘 순댓국집에 들러 술국을 시켜놓고/소주잔을 나누는 희망의 푸른 그림자다’(‘희망의 그림자’ 부분)
박한신 기자 hansh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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