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상적 관계 용납 안해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
'格의 정상화' 관철 의지
남북경색 장기화 우려도
6년 만에 성사될 뻔했던 남북 당국회담이 대표의 ‘격(格)’ 문제로 무산되자 박근혜 대통령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가 시험대에 올랐다는 지적이 나온다. 야당 일각에선 박 대통령 스스로 ‘형식’에 사로잡혀 ‘신뢰 프로세스’의 발목을 잡은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그렇지만 청와대 관계자들의 얘기를 종합하면 ‘신뢰’와 ‘원칙’을 강조하는 박 대통령의 대북 정책 접근방식은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 4월 개성공단 가동 중단 사태와 이번 당국회담 무산 등을 거치면서 오히려 박 대통령의 대북 정책 ‘원칙’이 확고해지고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박 대통령의 의중을 잘 아는 청와대 관계자가 12일 기자들과 만나 “‘형식은 내용을 지배한다’는 말씀을 대통령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이번 일에서) 그 말이 굉장히 일리 있다고 본다”고 말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회담 무산을 비판하는 측에서 “격이라는 ‘형식’에 집착하다 남북 간 신뢰를 쌓을 기회라는 ‘내용’을 등한시했다”고 주장하는 데 대한 반박으로 해석된다. 정부가 이날 “북한에 추가회담을 위한 수정 제의를 안 한다”고 못 박은 것도 박 대통령의 원칙적인 대응이 계속될 것이란 점을 시사한다.
이번 남북회담 준비 과정에서 확인된 박 대통령의 ‘원칙’ 중 하나는 과거 행태를 답습하는 ‘보여주기식 이벤트’는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른바 ‘회담을 위한 회담’은 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청와대 관계자는 “과거 정부가 단기 성과에 급급해 조급하게 회담에 임한 결과 매번 북측에 끌려다녔고 대표들 간 격이 맞지 않는 비정상적인 상태가 지속돼 왔던 것 아니냐”며 “결과적으로 성과도 없었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이 지난 10일 외교안보장관회의에서 “신뢰에 바탕을 두고 새롭고 발전적인 남북관계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나 회담이 무산된 직후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과거에 해왔던 것처럼 굴종이나 굴욕을 강요하는 행태는 발전적인 남북관계를 위해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고 말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박 대통령이 회담 준비 과정에서부터 ‘격’의 문제를 강조한 것도 이런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관계자는 “서로가 존중하면서 진지함과 진정성을 갖고 회담에 임해야 좋은 결과도 나오고 남북관계 신뢰 프로세스의 길이 열리게 된다는 게 대통령의 생각”이라고 전했다.
서두르지 않고 목표를 향해 차근차근 한발 한발 내딛는다는 박 대통령의 이른바 ‘나침판형 스타일’이 대북 정책에 그대로 적용된다는 분석도 있다. 청와대 관계자는 “등산을 할 때 지도를 보며 정해진 길을 따라가는 ‘지도형’과 달리 박 대통령은 나침판을 보며 목표 방향이 맞다면 등산로를 벗어나더라도 묵묵히 목표를 향해 가는 스타일”이라며 “이것이 남북관계 접근방식에도 적용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남북관계의 원칙을 지키고, 대화 과정에서부터 상식에 맞는 시스템으로 돌려놓아야 질적인 남북관계의 발전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여기에는 개성공단 사태를 겪으며 일관된 원칙을 갖고 대응한 것이 동북아 정세의 상황 변화와 맞물려 북한의 대화테이블 복귀라는 태도 변화를 끌어냈다는 ‘자신감’이 작용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다만 박 대통령의 ‘원칙’이 이런 의도와 달리 북한에 대화 거부의 명분을 주고, 결국 남북관계의 단절이 재연될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정종태/도병욱 기자 jtch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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