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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영 20년(上)]뜯고 분해하고 비교하고…천덕꾸러기서 '퍼스트무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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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영 20년(上)]뜯고 분해하고 비교하고…천덕꾸러기서 '퍼스트무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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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제품과 일본 경쟁제품을 사장들, 임원들이 사서 봐야 한다. 귀국길에 일본에 들러서 자기가 만들고 있는 같은 부류의 제품을 한 대씩 사가지고 가라. 서울에 가서는 우리 제품과 금성사, 대우제품도 직접 사서 비교하고 고민하고 대책을 세워라" - 1993년 이건희 회장 LA 회의록 중.


    경기도 수원에 들어설 삼성전자 R5 연구소는 오는 10일 준공을 앞두고 한창 분주하다. 공사는 거의 마무리됐지만 준공과 함께 이곳에서 열리는 '이노베이션 포럼' 준비에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지난해까지 '선진제품비교전시회'라 불린 이 행사는 올해부터 이노베이션 포럼으로 이름을 바꿨다. 행사도 기존에 비공개로 진행하던 것에서 외부 공개로 전환하기로 했다.


    이건희 회장이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모든 것을 다 바꾸라"고 강조한 '신경영 선언'이 7일로 꼭 20주년을 맞은만큼 신경영의 상징인 이 행사를 통해 의미와 성과를 되짚어보기 위해서다.

    ◆ "먼지 구덩이에 처박힌 제품에 왜 삼성 이름을 쓰는가"



    1993년 2월. 이 회장은 미국 LA에 도착하자마자 시내에 있는 전자제품 매장을 찾았다. 한 쪽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천덕꾸러기'처럼 방치돼 있는 삼성 제품을 발견한 이 회장의 심정은 참담했다.

    이 회장은 그 길로 전자 계열사 주요 임원들을 LA로 호출해 각 매장을 둘러보게 한 뒤 '비교평가' 회의를 가졌다. 이노베이션 포럼의 시작이었다.


    취지는 경쟁제품과 비교해 삼성의 현주소가 어디인지 알아보는 것이었다. 삼성이 잘 한다고 자부하며 만든 제품들이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에서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 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자는 것.

    이 회장은 첫 포럼에서 "'삼성'이란 이름을 반환해야 한다"며 "먼지 구덩이에 처박힌 것에다 왜 삼성 이름을 쓰는가, 진열대에 놓여있는 제품 중에는 뚜껑이 깨져 있거나 작동 안되는 것도 많다. 이는 주주, 종업원, 국민,나라를 기만하는 행위"라고 임원들에게 호통쳤다.


    또 "2등은 현상 유지밖에 안되고 못 큰다. 2등, 3등은 맨날 그 모양 그 꼴"이라며 "상대방을 찬양하고 인정하고 승복하고, 그리고 이기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삼성 관계자는 "우리 수준이 어디인지를 제대로 파악하자는 것이 이노베이션 포럼의 출발이었다"며 "현실직시를 통해 우리가 나가야 할 방향과 세계 일류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보완해야 하는 지 알아야 했다"고 말했다.



    일류 제품들과의 적나라한 비교를 통해 자기반성을 한 이 회장은 그 해 6월 독일 푸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을 선언했다. 이노베이션 포럼이 신경영의 아이콘이자 상징으로 불려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질을 위해서면 양을 희생시켜라…라인·생산중단도 좋다"

    이 회장은 양이 아닌 '질'(質) 을 신경영 핵심으로 내세웠다. 이전까지 삼성 경영진의 관심은 지난해 보다 얼마나 많이 생산하고 판매했는가였다. 각 사업부는 눈앞의 양적 목표 달성에 급급해 부가가치, 시너지, 장기적 생존전략 같은 질적 요인들을 소홀히 했다.

    이 회장은 "질 경영이란 2류가 1류 되자는 것"이라며 "이제 양 위주의 의식, 체질, 제도, 관행에서 벗어나 질 위주로 철저히 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양과 질의 비중을 5:5나 3:7로 가자는 것이 아니다"며 "아예 0:10으로 가자는 것이다. 질을 위해서라면 양을 희생시켜도 좋다. 제품과 서비스, 사람과 경영의 질을 끌어올리기 위해 필요하다면 공장이나 라인의 생산을 중단해도 좋다"고 선언했다.

    이에 따라 삼성은 불량을 없애는 제품의 질부터 혁신을 시작했다. 생산라인을 중단시키더라도 불량을 선진 수준으로 낮추도록 했으며, 한 품목이라도 좋으니 세계 제일의 제품을 만들기로 했다.

    사람의 질을 높이기 위해 인사제도를 개선하고, 창의적이고 자율적인 조직문화를 만들어 나갔다. 경영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형식적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정보인프라를 구축하고, 사업구조를 고도화시켜 나갔다.

    김창봉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한국기업경영학회 수석부회장)는 "경영학 관점에서 보면 신경영은 밸류체인(가치사슬)의 부가 가치를 높이는 선순환 구조 정립에 큰 도움이 됐다"며 "품질을 높여 가격으로 보상받고 이를 통해 수익이 높아졌다. 그러다보니 고객만족에 재투자하는 구조가 정착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새롭고 혁신적인 제품을 다른 기업보다 많이 출시해 경쟁사 제품을 소비자로 하여금 구식 제품으로 인식하게끔 하는 효과가 있다"며 "이같은 전후방 효과들이 합쳐 삼성이 글로벌 선두기업으로 성장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첫 이노베이션 포럼과 신경영 선언이 있은 지 올해로 20년. 삼성은 그동안 반도체와 TV, 휴대폰에서 세계 일류 대열에 올라섰다.

    소니, 도시바, 파나소닉, 애플 제품을 뜯고 분해하고 삼성 제품과 비교하며 질적 혁신을 기울인 결과
    삼성을 더 이상 '패스트 팔로워'(1등을 빠르게 뒤쫓는 2등)라 부르는 이는 없다.

    지난 해 기준으로 세계 시장에서 월드베스트(1등)에 오른 삼성전자 제품은 20개다. 점유율을 놓고 보면 휴대폰, 스마트카드, 모바일 CMOS 이미지센서 등이다. 매출액 기준으로는 TV, 모니터, 낸드플래시, 모바일AP 등이 세계시장을 석권했다.

    올해 이노베이션 포럼은 경쟁사의 제품과 비교를 하는 대신 삼성전자가 지금까지 만들어낸 제품들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으로 내용을 바꿨다. TV와 휴대폰을 비롯해 세탁기, 냉장고 등 생활가전제품,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이 전시될 예정이다.

    삼성전자가 이미 여러 분야에서 1등에 올라선 만큼 경쟁사들의 제품과 비교하는 게 무의미하다는 판단이 들어간 것으로 풀이된다.

    패스트팔로워에서 퍼스트무버(시장선도자)로 나가지 않으면 10년, 20년 뒤 또 다른 위기를 겪게 될 지 모른다는 인식도 작용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경닷컴 권민경 기자 k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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