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통화전쟁
통화전쟁은 역사 속 영토전쟁만큼이나 격렬하다. 이는 자국의 통화가치를 낮춰 수출 경쟁력을 높이려는 총성 없는 경제전쟁이다. 일본 요시카와 모토마다 가나가와대 교수는 ‘머니패전’에서 “1990년 일본 버블 붕괴는 달러의 공격에 엔화가 패배한 것”이라며 “2차 세계대전 패배와 맞먹을 만큼의 충격이었다”고 쓸 정도다. 일본은 지금 ‘잃어버린 20년’에서 탈출하기 위해 아베노믹스를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고 주요 선진국(G20)의 암묵적 용인 속에 경제가 다시 힘을 받는 모습이다. 양적완화·엔저가 골자인 아베노믹스로 재점화된 통화전쟁에서 주요 선진국 역시 양적완화(quantity easing)로 돈을 시중에 뿌려대고 있다. 통화전쟁은 경제를 살리기 위한 몸부림이지만 이로 인해 인플레이션과 자산버블이 커질 것이라는 우려도 적지 않다.
# 총성 없는'돈 풀기 전쟁'
1985년 미국·영국·프랑스·독일·일본 재무장관이 뉴욕 플라자호텔에 모였다. 당시 미국은 쌍둥이(재정과 무역)적자를 기록하는 등 경제상황이 심각했다. 다른 나라 재무장관들에게 미국은 달러화 강세를 시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핵심 대상 국가는 일본과 독일. 두 나라가 미국을 상대로 막대한 무역흑자를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플라자합의’다. 플라자합의 후 일본 엔화와 독일 마르크화의 가치는 즉각 올랐고 달러화 가치는 급락했다. 미국은 자국 통화가치 하락을 통해 수출 경쟁력을 높이고 막대한 쌍둥이 적자의 부담을 줄일 수 있었다. 플라자합의는 통화(환율)의 힘 겨루기였다.
역사적인 통화전쟁은 크게 세 차례 있었다. 1930년 대공황을 촉발한 1차 통화전쟁(1921~1936년), 브레튼우즈 체제가 붕괴된 2차 통화전쟁(1967~1987년), 그리고 2010년 이후 현재의 3차 통화전쟁이다. 특히 일본의 아베노믹스로 인해 재점화된 글로벌 통화전쟁은 각국이 수출을 통한 경기회복을 노려 경쟁적으로 자국 화폐 가치를 끌어내리고 있다. 미국 중앙은행(Fed)은 경기 회복이 뚜렷해질 때까지 유동성을 공급하겠다고 밝혔고, 유럽중앙은행도 무제한 국채 매입을 선언했다. 한국 역시 양적완화의 막차를 타 지난 9일 기준금리를 2.75%에서 2.5%로 0.25%포인트 인하했다. 헝가리 인도 터키 폴란드 멕시코 이스라엘 역시 금리인하에 가세했고 남아공 중동까지 동참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유동성 함정과 통화정책
통화정책은 중앙은행이 통화량이나 금리를 조정함으로써 경제의 안정과 성장을 도모하는 정책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중앙은행은 경제가 침체되고 (기대)인플레이션이 목표 수준보다 낮으면 이자율을 낮춰 경기를 진작시키려 한다. 이처럼 경제상황에 따라 이자율을 조정하는 통화정책은 테일러 준칙(Taylor Rule)이라 한다. 하지만 경제가 유동성 함정(liquidity trap)에 빠질 경우 테일러 준칙에 의한 통화정책 시행에 문제가 발생한다.
유동성 함정은 명목 단기 이자율이 0 또는 0에 가까운 상태에서 통화공급을 늘려도 경기부양 효과보다 부작용만 초래되는 상황을 일컫는다. 유동성 함정은 본래 케인시안이 주장한 이론이다. 통화 공급량이 물가와 산출량에 미치는 영향은 명목이자율에 크게 좌우된다. 통화량이 증가하면 이자율이 하락하고 투자와 소비의 수요를 확대해 산출량을 증가시키는 매커니즘이다. 하지만 유동성 함정에 빠지면 통화정책은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이자율 하락에 따른 생산과 지출의 확대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통화정책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는 경제상황에서는 새로운 정책 대응이 필요하다. 적극적인 재정정책(정부지출과 조세에 관한 정부정책)으로 유동성 함정에 대응하기도 하지만 세계 각국은 앞다퉈 양적완화 정책으로 경기 회복을 노리고 있다.
#글로벌 양적완화에 경고
“Fed의 양적완화 정책은 핵폭탄이다.” “일본은행의 채권 매입 프로그램은 다단계 금융사기의 반복이다. 이제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월스트리트의 유명 헤지펀드 매니저들이 최근 미국 뉴욕 아이라 손 투자 콘퍼런스에서 미국 중앙은행·일본은행 등 주요국의 통화 완화정책을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이 콘퍼런스에서 영향력 있는 헤지펀드 매니저들의 발언은 매년 시장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
세계적인 해피펀드 매니저이자 헤이먼캐피털 창업자인 카일 배스는 일본 금융완화 정책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나섰다. 유럽 재정위기를 예견한 것으로 유명한 그는 “70년간 지속된 일본 채권 랠리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며 “금리가 오름세로 돌아서면 게임은 끝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이 심각한 부채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경고다. JP모건체이스 역시 시장에서 각국의 금리 인하 경쟁으로 시중에 과도하게 풀린 유동성으로 자산 가격에 거품이 낄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향후 발생할 수 있는 자산 버블로 겨우 살아날 조짐을 보이는 세계 경제가 홍역을 치를 수 있다는 얘기다. 경쟁이 붙은 글로벌 양적완화가 세계경제 회복의 보약이 될지 자산붕괴의 빌미가 될지 좀더 지켜볼 일이다.
손정희 한국경제신문 연구원 jhson@hankyung.com
< 논술 포인트 >
세계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통화전쟁이 어떤 양상인지 상세히 알아보자.
양적완화의 정의와 필요성, 부작용을 토론해 보자. 유동성 함정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이를 탈출하는 방법을 논의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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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은행 발권력 동원해 돈 찍어내는 '양적완화'
양적완화는 중앙은행이 발권력을 동원해 찍어낸 돈을 시중에 직접 공급하는 정책을 말한다. 재무부가 채권(국채)을 발행하고, 중앙정부가 이를 사들이는 방식이 주로 사용된다. 기준금리가 제로에 근접해 금리 인하만으로는 경기 부양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할 때 양적완화 정책을 쓴다.
중앙은행은 국채나 회사채 모기지 증권 등을 사주는 방법으로 시중에 통화를 공급한다. 미국 중앙은행(Fed)의 양적완화 조치는 2008년 11월 시작됐다. 무제한적 달러 살포라고 묘사될 정도로 엄청난 달러를 시중에 풀었다. 유럽도 양적완화 정책으로 많은 돈을 찍어냈다. 일본 아베 정부의 경제정책을 의미하는 ‘아베노믹스’의 핵심도 양적완화다.
하지만 양적완화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경기 부양 효과는 제대로 내지 못하고 물가 상승과 달러 가치 하락만 부채질할 것이란 지적이다. 이른바 유동성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Fed는 2007년 5.25%였던 단기기준금리를 15개월 새 10차례나 내려 제로 수준으로 낮췄다. 벤 버냉키 Fed 의장은 명목금리를 더 이상 낮추기 어렵게 되자 국채를 비롯한 다양한 금융자산을 사들이거나 담보로 잡고 돈을 푸는 양적완화 정책을 썼다.
그런 그를 시장은 ‘헬로콥터 벤’으로 묘사했다. 헬리콥터를 타고 달러를 살포하는 버냉키의 모습을 빗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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