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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사상사 여행] "개인의 주관적 판단이 가격 결정"…오스트리아학파 창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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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자유주의 경제학 혁명가 칼 멩거

칼 멩거(Carl Menger)는 19세기의 유럽 자유주의자 중에서 가장 늦게 등장했지만 오늘날 가장 신뢰할 만한 자유주의 지식을 공급하는 오스트리아학파를 창시했다.

폴란드의 크라카우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잠시 경제담당 신문기자로 활동하다 공무원이 된 멩거는 오스트리아 수상실에서 공보관으로 일하며 경제변동 및 가격변동 조사업무를 담당했다. 그런 직책 수행 과정에서 그는 현실의 가격변동과 전통적인 가격이론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전통적인 가격이론은 노동투입량(생산비용)의 변화를 통해 가격변동을 설명할 수 있다는 노동가치론(비용가치론)이었다. 그러나 멩거는 그런 생산비용과는 전혀 관계없이 아연이나 밀 값이 변동한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몹시 당황했다. 고민 끝에 가격 형성의 최종 원천은 소비자의 ‘주관적’ 가치평가라는 결론을 내렸다. ‘주관주의’를 잘만 개발하면 경제현상을 멋지게 설명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자 다니던 직장을 접고 경제학 연구에 매진했다.


멩거가 개발한 주관주의는 이렇다. 가격, 시장, 화폐, 법 등 경제현상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개인행동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런 현상은 개인들의 행동의 결과라는 이유에서다. 그런데 각 개인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경제 환경에 대한 그들 각자의 인식 결과, 즉 지식이다. 흥미롭게도 그 지식은 각 개인들에게 고유하다는 의미에서 주관적이다. 따라서 가격수준의 변동은 개인의 주관적 행동의 결과라는 것이 멩거의 설명이다.

빵값이 비싼 것은 빵 생산을 위한 노동량이 증가했거나 밀가루값이 올랐기 때문이 아니라 소비자들이 빵 가치를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라고 멩거는 주장한다. 생산요소들의 비용가치는 각 요소들의 생산적 기여에 대한 소비자의 가치평가를 통해 결정된다는 주장도 혁명적이다. 생산비용이 가격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격이 생산비용을 좌우한다는 뜻이다. 납품 가격은 부품을 조립해 만든 제품 가격에 달려 있기에 원자재 가격 인상이 납품가에 반영돼야 한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소비자가 인상된 가격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실현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인간만이 생각하고 판단하기에 이를 다루는 경제학은 자연과학과 달라야 한다는 것이 멩거의 생각이다. 그래서 자연과학을 모방한 계량경제학이나 수리경제학을 믿지 말라고 주장한다. 그가 총공급, 총수요 등 총합변수와 거시경제학을 반대하는 것도 그것이 경제주체들의 주관성에 기인한 이질성과 다양성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멩거의 시장비전이다. 시장은 소비자 중심 사회라는 것이 멩거의 탁월한 통찰이다. 시장은 소비자들의 주관적 행동에 의해 전적으로 조종된다는 뜻이다. 생산의 최종 목적은 소비라는 것도 시장을 보는 시각을 생산에서 소비로 바꾼 혁명적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자유시장이 소중한 이유도 소비자 주권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기업가정신은 소비자의 선호를 예측해 이를 가장 저렴한 방식으로 충족시킬 방법에 관한 지식의 창조적 발견이다. 이런 경쟁적 발견 과정의 결과가 경제적 번영이다. 소비자 선호에 충실한 번영, 이것이야말로 시장경제의 존재 이유라는 것이 멩거의 주장이다.

그러나 시장경제의 소비자 중심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국가의 개입을 부르게 되는데, 그 결과는 치명적이라고 지적한다. 이는 대기업 규제와 중소기업보호를 특징으로 하는 ‘경제민주화’도 소비자 중심원리와 저촉되고 그래서 위험하다는 뜻이다.

인간은 시간 속에 존재하므로 자신의 외부세계는 물론이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안다고 해도 틀릴 수 있다. 그래서 인간들에게 지속적인 배움의 장이 필요한데, 이것이 시장이라는 멩거의 인식도 독특하다. 완전히 아는 사람들의 세계에서는 시장이 불필요하다는 의미다. 그런 학습과정 때문에 시장은 역동적 과정이지 정태적 균형이 아니라는 게 멩거의 설명이다.

멩거의 혁명적 인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자생적 질서’의 발견이다. 시장가격과 시장현상은 통치자가 계획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주관적인 행동으로부터 의도하지 않게, 즉 자생적으로 생겨나는 결과라는 얘기다.

화폐의 기원에 대한 멩거의 역사인식도 흥미롭다. 화폐도 통치자가 만든 것이 아니라 상품거래 과정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났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런 인식은 통화량의 증가만큼 물가가 인상된다는 화폐수량설을 버리고 주관주의 화폐이론을 개발할 수 있는 기틀이 됐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자생적 질서 개념은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사회와 제도를 바꿀 수 없다는, 그래서 정부의 개입은 억제해야 한다는 자유사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자유와 책임은 한 나라의 전반적 발전을 위한 기초이고 그래서 정부는 이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던 멩거는 주관주의를 기초로 사회를 바라보는 새로운 경제학적 인식체계를 구성했다. 그래서 그는 ‘자유주의 경제학의 혁명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세기 자유주의의 거성이었던 미제스와 하이에크가 이어받은 사상도 바로 멩거의 사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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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의 거성…미제스·하이에크에 영향

멩거 사상의 힘

칼 멩거의 사상이 등장하던 1860년대 중반까지 오스트리아는 자유무역이 번창했고 시민들은 언론·사상·학문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빈의 카페는 온통 정치적, 학문적 토론의 장이었다. 수많은 학자, 지식인이 빈으로 몰려들었다. 이런 지적 풍토에서 새로운 사유 방식의 개발을 위한 노력이 왕성했다.

이런 배경에서 멩거는 경제학의 ‘진정한 혁명’을 일으켰다. 멩거는 인간행동을 결정하는 요인으로서 행동동기만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인간의 인지도 주관적이라고 보고 시장이론과 시장철학을 개발했다. 멩거는 이론을 무시하고 역사만을 중시하는 역사학파와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그는 이론이 없으면 역사의 의미도 읽을 수 없다는 이유로 역사주의를 반박했다. 멩거의 승리로 끝난 세기적 ‘방법론 논쟁’이다. 그는 이론의 절대적 중요성을 복권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멩거의 강의는 유명했다.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심지어 미국 학생들도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빈으로 몰려들었다. 경제자유의 신봉자였던 그가 당시 오스트리아 왕세자 루돌프의 가정교사로서 강의한 것도 경제자유가 많을수록 경제활동이 왕성해져 개인이나 나라 경제도 번영한다는 내용의 정치경제학이었다. 19세기 말의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노동문제로 사회주의 운동이 강력해지고 비스마르크의 집권으로 보호무역과 경제 간섭, 복지 정책으로 경제자유는 점차 줄어들었다. 이에 맞서 멩거는 정부 권력의 제한을 설파했다. 가축전염병 예방처럼 부정적인 외부효과를 제거하거나 철도, 운하 등 공공재 생산 이외에는 정부 간섭을 줄여야 한다고 설파했다. 그러나 당시 멩거의 사상은 주목받지 못했다.

20세기에 접어들어 유럽사회의 좌경화가 깊어지자 멩거의 추종자들이 등장했다. 미제스와 하이에크가 오스트리아학파를 이끌면서 멩거의 사상 체계를 확대·발전시켰다. 이를 무기삼아 이념전쟁에 나섰지만 패배하고 말았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사정이 달라져 오스트리아학파가 인정받기 시작했다.

1980년대 레이거노믹스와 대처리즘의 이론적·철학적 기반은 멩거가 창설한 오스트리아학파의 사상이었다. 오늘날에도 모든 형태의 간섭주의에 대항할 자유주의 지식을 제공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은 자유주의의 오랜 전통을 가진 영국이나 미국이 아니라 자유주의 정치역사가 길지 않은 오스트리아에서 형성된 학파라는 점이 흥미롭다.

민경국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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