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실수 요지경
원단 5000장 주문에 0 하나 더…헉! 다른팀 발령
숫자에 울고…
은행원 김계장 돈계산 틀렸다가 석달간 메꾼 돈이 한달치 월급
신입의 실수는 귀여워?
사장님 질책 쏟아지는 회의실, 음료수 놓고 나오며 비서가 "그럼 즐거운 시간 되세요"
임원·부장들 웃음 못참고 '빵'
“실수는 새로운 도전에 대한 증거”(알베르트 아인슈타인)라고도 하고, “실수는 무조건 일찍 경험해봐야 한다”(윈스턴 처칠)는 말도 있다. 노발대발하는 부장의 잔소리를 들으며 위인들의 명언이 떠올랐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실적 공시에 수치 하나 틀렸다고 이렇게까지 역정을 내다니…. 물론 그 실수 하나로 주가가 출렁이고 투자자들의 항의가 빗발치기는 했지만 ㅠㅠ. 갑자기 사장이 부장을 호출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까지 들려온다. 부장이 나를 노려보면서 사장실로 향한다. ‘앗, 이러다가 잘리는 거 아냐.’ 불현듯 아내의 얼굴이 떠오른다.
실수 때문에 식은땀을 흘려보지 않은 직장인이 과연 몇이나 될까. 애교로 웃어넘길 수 있는 사소한 착각에서부터 회사를 들었다 놨다 하는 ‘대형 사고’에 이르기까지, 김과장과 이대리들의 얼굴을 시뻘겋게 하는 실수담을 들어본다.
○전 직원에게 알려진 용비어천가
한 은행의 김모 지점장은 최근 자신의 상사인 영업본부장이 바뀌자 반색했다. 새로 부임한 본부장과 종교도 같은 데다 동향이기도 했다. 김 지점장은 신임 본부장에게 메일을 보냈다. 내용은 용비어천가 수준이었다. 넌지시 고향 얘기를 꺼내며 “본부장님과 일하게 된 것은 주님의 은총”이라는 말을 곁들였고 “충성을 다해 본부장을 모시겠다”는 말로 끝맺었다. 하지만 메일을 보내면서 사단이 났다.
컴맹에 가까웠던 그는 본부장에게 사내 메일을 보내기 위해 본부장 메일 주소를 클릭하면서 그 옆에 있는 ‘본부장 관할’까지 같이 클릭했다. 이 때문에 본부장이 관할하는 영업본부의 전 임직원에게 같은 메일이 뿌려진 것이다. 결국 전 사원에게 메일 내용이 퍼졌고 김 지점장은 당분간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는 신세가 됐다.
메일과 메신저는 직장인들의 실수를 불러일으키는 단골 창구다. 보험사 홍보팀 A대리는 같은 여직원인 B씨에 대한 ‘뒷담화’를 메신저로 C씨에게 보낸다는 것을, 실수로 B씨에게 보냈다. 이후 A대리와 B씨 사이에 언성이 오갔고 한동안 찬바람이 불면서 팀내 다른 직원들이 두 사람 눈치를 봐야 했다.
○분위기 파악 못한 말이 분위기 바꿔
사장이 주재하는 회의 시간. 영업실적이 부진하자 사장이 담당 임원과 부장들을 불러모아 강도 높게 질타하는 자리였다. 회의 참석자들에게 음료를 제공하기로 했던 비서는 갑자기 배탈이 나 갓 입사한 후배 비서 A씨에게 부탁했다. A씨가 음료를 들고 회의실로 들어섰을 때는 사장의 질책이 한바탕 지나간 뒤여서 분위기가 무거웠다. 회의실엔 A씨의 발소리와 음료를 테이블에 올려놓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쾌활한 성격으로 침묵이 어색했던 그는 회의실을 나오면서 목례와 함께 한마디 인사를 남겼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세요.”
순간 참석한 임원과 부장들은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시뻘개졌고, 사장의 한마디에 결국 빵 터졌다. “저 친구 노래방 서빙 알바하다 왔나?” 그 이후 회의실 분위기는 한층 화기애애해졌다. 임직원들은 회의실을 나오면서 저마다 A씨에게 감사의 인사말을 한마디씩 던졌다.
○직장인들의 영원한 난적 ‘숫자’
숫자로 일하는 금융회사에서는 실수 또한 대부분 숫자에 얽힌 것들이다. 한 시중은행의 김 계장은 최근 석 달간 시재(時在)를 못 맞춰 메꾼 돈이 한 달치 봉급에 육박한다. 은행 창구 직원들은 매일 오후 4시 영업이 끝나면 하루 동안 들어오고 나간 돈을 계산해 남아 있는 현금과 맞는지를 따져본다. 만약 돈이 모자라면 경우에 따라 자기 돈으로 맞춰야 한다. 1000~2000원 틀리는 정도야 ‘수수료 한 건을 안 받았나 보다’ 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김 계장에게 하루 2~3만원씩 틀리는 건 예삿일이다.
지난주에도 어김없이 해프닝이 일어났다. 이번엔 평소와 달리(?) 마감을 하고 보니 90만원이나 돈이 남는 게 아닌가. 전 직원이 달려들어 처음부터 다시 계산을 했다. 알고 보니 김 계장이 묶은 1000만원짜리 돈 다발 중 하나가 900만원에 불과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90만원이 남은 게 아니라 10만원이 모자란 셈이었다. 김 계장은 그날도 10만원을 고스란히 박고 퇴근했다. 생돈 나간 것도 억울한데 지점장한테 욕까지 바가지로 먹었다.
○‘0’ 하나로 인사발령
숫자로 이한 실수는 비단 금융회사뿐만 아니다. 의류회사 구매팀에서 일하는 이 과장은 원단을 발주하는 과정에서 5000장을 5만장으로 ‘0’을 하나 더 붙이는 실수를 했다. 문제는 구매 품의서를 올리고 발주서를 작성한 뒤 재무팀과 임원 결재 과정에서도 이 실수가 그대로 이어졌다는 것. 회사는 1000만원이 넘는 손해를 봤다. 고개를 푹 숙이고 다니는 이 과장에게 담당 임원이나 부장은 “어쩔 수 없지”라고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다.
그렇게 한숨 돌리고 안도한 것도 잠시, 그는 다음달 인사에서 다른 팀으로 발령이 났다. “그해 연말 보너스도 같은 팀 동기에 비해 절반도 못 받았어요. 손해본 걸 제 보너스에서 제한 것 같아요.”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며
엔터테인먼트 업체에서 마케팅을 담당하는 황 과장은 3개월 전 실수 하나로 한동안 불면의 밤을 보내야 했다. 그는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평면TV, 노트북, 태블릿PC 등 다양한 정보기술(IT)기기 경품을 내건 이벤트를 실시했다.
참여 열기가 예상외로 뜨거워 내심 흐뭇해하던 황 과장. 하지만 총무팀으로부터 “경품 규모가 예산 책정안을 초과했다”는 말을 듣고는 가슴이 덜컥했다. 의사소통상 오해로 회사에서 허가한 비용보다 경품 300만원어치를 더 사들인 것. 이미 추첨이 끝나고 당첨 결과까지 통보된 상황이었다. ‘내 돈이라도 넣어야 하나’ 하고 고민하던 그는 결국 밤을 꼬박 새우면서 궁리한 끝에 모든 경품의 사양을 조금씩 낮추는 방법으로 예산을 맞췄다. 15인치 대신 13인치 노트북을 제공하는 식이었다.
겨우 한숨 돌렸다 싶었는데, 이번엔 이메일로 당첨자들의 항의가 이어졌다. 원래 내건 경품과 다르다는 원성이었다. 내심 ‘공짜로 주는 건데 그냥 받아!’라고 하고 싶었지만 발끈한 당첨자가 혹시나 회사 게시판에 글이라도 올리면 자신이 잘릴 판이었다.
황 과장은 그 후 며칠간 이어진 당첨자들의 항의에 일일이 읍소에 가까운 해명을 하며 무마시켜야 했다.
고경봉/윤정현/김일규/정소람 기자 kgb@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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