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첫 여성총장 22일 학교 방문 '명예이화인' 된다
'글로벌 이화, 과학 이화, 여성 지도자 육성' 비전 강조
<대담 최인한 한경닷컴 뉴스국장>
이화여대 정문에 들어서면 눈앞에 장관이 펼쳐진다. 세계적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가 설계한 지하캠퍼스 ECC(이화 캠퍼스 복합단지)다. 해외 관광객과 건축학도들이 꼭 들르는 명소다. 비스듬한 경사로 확 트인 ECC를 통과하면 총장실이 있는 본관(파이퍼홀)을 만난다.
본관 외양은 첨단 ECC와 정반대. 1935년 건립된 고딕 양식의 건물은 고색창연했다. 못 하나 쉽게 못 박는 등록문화제 제14호다. 총장실은 본관 입구 오른쪽에 있다. 규모도 크지 않다. 검소하고 단아했다. 밖에서 보는 이화여대의 화려한 분위기와 거리가 멀었다.
김선욱 이화여대 총장(61·사진)은 그곳에서 조용히 일행을 맞았다. 여성 최초로 법제처장을 지낸 법학자. 다소 딱딱할 것이란 선입견과 달리 인터뷰 내내 온화한 미소가 돋보였다. 새 학기를 맞아 한 주 내내 학생들을 만나 얘기를 들어주는 '엄마 리더십'의 주인공이다.
김 총장이 특히 바쁜 이유가 있다. 22일 하버드대 첫 여성 총장인 드류 길핀 파우스트 총장이 학교를 찾아 '명예 이화인'을 수여받는다. 파우스트 총장은 국내 대학 가운데 유일하게 이화여대를 방문한다.
왜일까. 이화여대와 하버드대가 수년째 맺어온 교류·협력이 빛을 발했다. "세계 최대 여대인 이화는 해외에서 더 유명하다"는 게 김 총장의 자랑이다.
이화여대의 지향점은 '글로벌 여성교육 허브'다. 국내 여성교육이 어렵던 시절 여성인재를 길러낸 축적된 경험과 가치를 해외 여성들과 나눈다는 것이다. 취지에 걸맞게 제3세계 개발도상국 여성들이 타깃이다. 장학금과 생활비 지원까지 곁들였다.
김 총장은 '과학 이화' '여성 지도자 육성'을 비전으로 내걸었다. 거창하지 않아 더 설득력이 컸다. 이화여대에 대한 세간의 편견을 언급하면서도 억울함을 털어놓기보단 "풀어야 할 과제"라고 담담히 말했다.
기존 명성에 안주하지 않고 변화할 것이란 입장도 내비쳤다. 지지와 격려로 여성을 성장시키는 이화 특유의 교육은 계속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화는 여성 지도자를 키우는 대학" 이라며 "종합대, 남녀공학과 경쟁하되 여대임을 잊지 않겠다"는 김 총장을 19일 만났다.
- 하버드대 총장이 학교를 찾습니다. 어떤 인연인가요.
"인연이 꽤 오래 됐어요. 2006년 '이화-하버드 썸머스쿨'을 시작했죠. 하버드대가 진행하는 국내 유일 썸머 프로그램입니다. 학부 간 교류프로그램 '이화-HCAP(하버드 칼리지 인 아시아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에요. 저도 2011년 10월에 하버드대를 방문해 파우스트 총장을 만나고 온 적 있습니다."
- 명예 이화인 칭호를 주기로 했다면서요.
"하버드대 300여년 역사에서 첫 여성 총장이에요. 여성의 역사를 개척해 나가는 그분의 삶 자체가 이화가 추구하는 모습이죠. 마땅히 지원하고 격려할 부분인데 마침 방한 일정이 맞아떨어졌습니다. 파우스트 총장이 22일 캠퍼스를 찾으면 특강과 함께 학생들과의 대화도 가질 예정입니다. 하버드대와도 더욱 돈독해지는 계기가 될 겁니다."
- 이화여대만 방문하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여성 총장이라 한국의 여대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 것 같습니다. 파우스트 총장도 이화여대를 통해 한국 대학과 의미 있는 교감을 하고 싶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 힐러리 클린턴 전 미 국무장관도 이대를 찾았죠.
"2009년에 캠퍼스를 방문했죠. 연설 내용도 아주 좋아 화제가 됐어요. 명예 이화인은 이화의 정신을 실천하는 분들 중에 비(非)이화여대 출신에게 드리는 칭호입니다. 명예 이화인 1호가 클린턴 전 장관, 2호가 이번에 방문하는 파우스트 총장이에요."
- 해외에서 이화여대의 명성이 더 높은 것 같습니다.
"이화는 한국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이름이 알려져 있습니다. 규모나 내용 면에서 전 세계에서 유일한 여대거든요. 이과대학 공과대학 법과대학을 모두 가진 여대는 이화여대뿐입니다. 이화가 여대로 성취해 온 역사나 경험을 알면 다들 놀라죠.
저도 총장이 돼 자세히 살펴보니 기적 같은 역사입니다. 한 명의 학생으로 시작해 127년 역사를 거쳐 지금까지 온 거예요. 대학 글로벌화도 국제하계대학 실시로 이화가 가장 먼저 시작했죠. 학생 수가 이화보다 많은 대학은 있어도 출신 국가(66개국)의 다양성은 이화가 최고입니다."
- 국제화 프로그램은 어떤 게 있는지 소개해주시죠.
"많은 외국 학생들이 우리 학교에서 공부하고 싶어합니다. 저희도 이화정신을 잘 가르쳐 그 나라를 이끌 여성 지도자를 키우자는 사명감이 있어요.
EGPP(이화글로벌 파트너십프로그램)는 개도국 여성인재에게 장학금과 생활비 전액을 지원합니다. 2006년부터 지금까지 150여명이 혜택을 받았고, 과정을 마친 뒤 본국에 돌아가 교수가 된 케이스도 있어요.
'이화-KOICA(한국국제협력단) 석사과정'은 개도국 여성공무원들을 위한 프로그램입니다. KOICA 경비를 지원받아 학교에서 모든 커리큘럼을 운영합니다. 지난해엔 EGEP(이화글로벌 임파워먼트프로그램)을 신설해 아시아, 아프리카 비정부 공익부문 중간지도자로 키워내고 있어요. 이화와 네트워킹 하면서 성장하길 바라는 프로그램들입니다."
- 해당국 반응은 어떤가요.
"아주 좋아요. 이화는 국내 여성이 고등교육 혜택을 못 받던 시절 많은 역할을 했습니다. 이제 해외에 눈길을 돌리고 있어요. 우리가 경험하고 성취한 것을 공유하는 게 이화의 사회적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파우스트 총장도 이런 프로그램에 관심을 갖고 협력해 나가자고 얘기합니다. 모두가 자국 인재뿐 아니라 세계에 대한 관심을 함께 가져야 할 때가 된 것 같아요."
- 글로벌과 함께 '과학 이화'를 강조하는 걸로 압니다.
"이화에서 노벨과학상 1호를 꿈꿔보자, 그런 의미가 있죠. 미래엔 과학이 중요해요. 캠퍼스 안에 솔베이 글로벌본부 R&D(연구·개발) 센터가 공사 중으로 올 12월 완공될 예정입니다. 솔베이와 산학협력을 하면서 많은 걸 느꼈어요. '미래과학은 여성'이란 신념이 우리보다 솔베이가 더 강하더군요.
그동안 솔베이 포럼을 통해 8명의 노벨과학상 수상자가 배출됐어요. 그 가운데 퀴리 부인도 있어요. 제2의 퀴리 부인을 키워내자며 솔베이와 손잡았습니다. R&D 센터가 들어서는 산학협력관에는 기초과학연구단(IBS)도 유치했어요. 연간 100억 원씩 10년간 최대 1000억 원의 정부 지원을 받아 기초과학 연구를 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집니다."
- 이대 하면 인문계 색채가 짙은 편인데, 앞으로 기초과학에 주력하는 겁니까.
"수학과 물리학과 환경공학과 식품공학과 수학과 등은 학과별 평가에서 전국 1위를 하곤 합니다. 여대로서 자연과학 규모 면에선 유리하지 않은데도 기초역량이 있는 거죠. 1996년 여대 최초로 공대를 만들었어요. 알차게 하고 있는 편입니다. 또 최근 트렌드는 융합이잖아요. 이화가 가진 인문계 강점을 바탕으로 융합적 연구가 이뤄지면 큰 성과가 나올 겁니다."
- 여성 대통령 탄생은 어떻게 평가하나요.
"여성 입장에서 굉장히 의미 있는 일입니다. 이화는 그동안 많은 분야에서 최초의 여성 리더를 배출해 온 역사가 있어요. 여성 대통령 탄생의 밑받침을 이화가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5년간 여성 대통령을 보면서 많은 어린이들이 '남자도 대통령 될 수 있어요?'란 질문을 많이 할 것 같아요. 그 상징적 의미가 엄청난 거죠."
- 새 정부 초대 내각에서 여성 인사 발탁이 기대에 못 미쳤습니다만.
"앞으로는 여성 인사 기용이 많아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미국도 여성 대통령보다 흑인 대통령이 먼저 출현했어요. 또 흑인이 여성보다 50여년 먼저 투표권을 갖게 됐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근대화 과정에서 남녀가 똑같이 투표권을 가진 역사가 있지 않습니까. 빠르게 바뀌고 있으니 영향을 미칠 것이라 봅니다."
- 여대 출신 최고경영자(CEO)는 조직 장악력이 부족할 것이란 선입견도 있습니다.
"양면적이죠. 어려움을 겪을 수도, 도전적으로 헤쳐 나갈 수도 있습니다. 일단 우리 사회가 아직 여성들에게 완전히 평등하지 않죠. 여대는 여학생들만 교육하면서 지지하고 배려하는 교육이 큰 장점이에요. 남녀공학에 비하면 여성의 장점과 리더십을 살리는 쪽에 포커스를 맞추죠. 하지만 결국 졸업 후엔 사회에서 남성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니까요. 사회 환경이 문제인데, 여성의 특수성을 받아주는 쪽이든 아니든 극복할 수 있게 키워내야죠."
- 이대 출신이 소위 '공주과' 란 편견도 있죠.
"편견이 많아요. 이대생이라서 그럴 것이다, 하는. 그런 편견들이 어디서 생겼을까요? (웃음) 온실 속에서 자랐다, 경제적으로 여유롭다, 이런 이미지가 오래됐는데 하루만 학교에 와 보세요. 사실이 아니란 걸 알게 될 겁니다. 치열하게 공부하고 장학금 고민도 많은 학생들이에요. 사실 이화에 대한 그런 편견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도 숙제입니다."
- 대학 간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벤치마킹 하고 있는 대학은 있나요.
"그런 모델이 있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화가 유일한 모델이라 고민되는 부분이 있어요. 이만한 규모와 역사로 성장한 여대가 이화밖에 없습니다. 개척하면서 나가야 하는 게 정말 힘듭니다. 물론 각 분야별로는 배우고 싶은 대학들이 있죠."
- 경쟁상대로 삼고 있는 곳은 없습니까.
"사우디왕립대(킹사우드) 초청 강연을 다녀오며 굉장히 많은 생각을 하게 됐어요. 대학에 대해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었습니다. 천연자원은 언젠가 끝난다는 생각을 하고 있더군요. 국가 예산의 30%를 대학과 지식산업에 투자해요. 여성의 지위를 마음 아파하며 갔지만, 대학에 대한 투자나 지원은 자칫 우리가 뒤질 수 있다는 절박감을 느꼈습니다."
- 대학을 운영하면서 어려움을 느낀 부분이군요.
"국내에선 반값 등록금 논란으로 대학 투자가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지금 대학이 위기란 생각을 많이 갖게 돼요. 꼭 재정 문제가 아니더라도, 대학이 사회 변화를 유도하고 이끌어가는 주체의 역할을 하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지금은 사회 변화에 대학이 따라가는 것 같아요. 대학이 기업이나 사회와 함께 하는 건 필요한데, 중심이 대학이 될 필요가 있죠."
- 경쟁을 피할 순 없습니다. 통합이나 인수·합병(M&A) 등 파격적 계획은 없습니까.
"그런 종류의 고민은 해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화가 변화의 문턱에 있는 건 사실이에요. 평가에서 전국 1위를 한 적도 있었는데, 그건 정성평가 시절 얘기입니다. 요즘은 정량평가 위주라 예체능과 사범계열 규모가 크고 공대 규모는 작은 이화의 경우 여러 평가지표에서 불리합니다. 과학 이화 비전이나 학생교육 강화, 기숙형 교육프로그램 레지덴셜 칼리지(RC) 도입도 그런 측면에서 고민하는 프로그램들입니다."
- 어떻게 전략을 바꿀 겁니까.
"예전엔 이화가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와 같은 범주로 많이 묶였습니다. 정량평가를 하니까 그게 힘든 거죠. 이젠 기존 가치를 극복하는 새로운 패러다임도 제시해야 할 때입니다. 그간 '이화는 우수한 대학'이라고만 알렸는데, 이제부턴 '여대'란 사실도 많이 강조하고 싶어요. 종합대와 당당히 경쟁하되 여성주의적 가치와 패러다임을 적극 추구하고 대학 운영에도 반영할 생각입니다."
- 법제처장을 지낸 법학자로서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문제는 어떻게 보는지.
"로스쿨로의 변화는 필요했다고 생각해요. 사법시험 제도가 굉장히 많은 인력 낭비와 법학교육 왜곡이란 문제점이 있거든요. 다만 그런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만든 로스쿨이 당초 목적대로 되지 않고 있는 한계가 있습니다. 변호사도 공익적 성격의 직업이라고 할 수 있잖아요? 사립대 로스쿨에 대해서도 일정 부분은 국가 지원이 강화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최근 로스쿨 출신 변호사가 많아지면서 취업이 어려워져 과잉 인력이라 생각하기 쉬운데요. 전체적으로 보면 변호사가 넘치는 사회는 아닙니다. 다만 유사 법조인이 많은 게 한국 사회의 특징이죠. 이런 인력이 로스쿨로 자연스럽게 흡수되면 문제가 해결될 겁니다. 법조인이 종전처럼 소송 업무만 하는 게 아니란 거죠. 로스쿨 제도 자체가 엄청난 비용을 치르고 도입됐기 때문에 사시 체제로 돌아가면 낭비가 너무 큽니다."
- 이대 로스쿨은 남성 입학이 제한돼 헌법소원 중인 걸로 압니다.
"그렇습니다. 물론 최근 여성의 사시 합격률이 40%를 웃돌고 판·검사 임용도 많이 되고 있어요. 하지만 아직도 위로 올라갈수록 남성중심 문화가 남아있는 게 법조계입니다. 대법관, 헌법재판관 남녀 비율을 보면 확실히 드러나죠. 이런 상황을 감안하면 여성들만 입학해 격려 받고 배울 이화 로스쿨의 사회적 의미를 아직까진 인정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 화제를 돌려보겠습니다. 총장실이 참 소박합니다.
"김활란 총장님 때부터 위치와 규모 모두 그대로입니다. 이게 이화를 지키는 힘이라고 생각해요. 이화가 적립금 많은 대학 1위로 비판을 많이 받는데요. 근검과 절약, 헌신으로 쌓은 것입니다. 제가 둔한 느낌을 싫어해서 내복을 안 입어요. 그런데 총장실이 겨울엔 추워 총장 취임 후 내복을 입었습니다. 얇은 내복이 나와 다행입니다. (웃음) 하나 같이 헌신하신 위대한 스승님, 선배님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저도 막내 총장으로 학교에 헌신하려 합니다."
- 요즘 수험생들은 여대 진학을 많이 고민하는 것 같은데요.
"고교 수험생들은 남녀공학에 가면 더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저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대학을 가고 싶다면 어디든 가라, 하지만 여성 지도자가 되고 싶다면 이화로 와라'. 우리 대학은 1학년보다 2학년이, 2학년보다 3학년이, 3학년보다 4학년이 학교생활 만족도 높아지는 유일한 대학입니다."
- 수험생이나 학부모에게 학교 자랑 한 말씀해 주시죠.
"제가 자주 비유하는 게 '코이' 란 잉어입니다. 일본의 관상어인데 작은 어항에서 기르면 5~8cm밖에 못 자랍니다. 그런데 강이나 바다에선 1~2m 크기까지 자란다고 해요. 여학생들이 최대한 클 수 있는 강이나 바다 같은 곳이 바로 이화입니다. 이화에 오면 늘 지지하고 격려해 여성 지도자로 성장시킬 수 있는 교육을 받을 수 있어요. 수험생이나 학부모들이 이화에 대한 생각을 진지하게 해보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 김선욱 총장은…
이화여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콘스탄츠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여성 최초로 법제처장을 역임했다. 한국젠더법학회장을 지낸 젠더법 권위자. 1995년부터 모교 법학과와 로스쿨 교수로 재직했으며 2010년 제14대 총장에 선임됐다.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장, 한국공법학회 부회장 등을 지냈으며 현재 한국독일동문네트워크 이사장을 맡고 있다.
글 = 한경닷컴 김봉구 기자 / 사진 = 변성현 기자 kbk9@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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