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병원에 갔다 13개월 손자 보느라 진땀 빼고 계시는 할머니 한 분을 보게 됐다.
아이는 병원이 신기한지 단 1분도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렸고 할머니는 행여 아이가 다칠세라 열심히 뒤를 쫒으셨다.
잡으려는 할머니와 잡히지 않으려는 13개월 손자 사이의 실랑이를 보고 있노라니 작년에 <할머니 수다 좌담회> 때 만났던 할머니들이 생각났다.
손주 돌보고 계시는 할머니 세 분을 모셔다 애환을 들어보는 자리였는데 2시간 예상시간을 훌쩍 넘어 4시간이나 이어진 자리에서 할머니들은 손주 보는 희로애락을 말씀하시면서 울고 또 웃으셨다.
그날 할머니들이 이구동성으로 말씀하신 것은 “손주는 예쁘지만 키우는 것은 너무 힘들다“라는 것이었다.
왜 아니겠나. 젊은 엄마들도 아이랑 몇 시간 실랑이 하고 나면 진이 다 빠지는데 기력 딸린 할머니들이 종일 아이를 돌봐야하니 당연히 힘들 수 밖에.
할머니 좌담회 이후, 손주를 돌보고 계시는 할머니들을 보면 그냥 지나쳐지지가 않았다.
“할머니 힘드시겠어요~” 라고 말을 건네자 할머니는 긴 한숨과 함께 말문을 여셨다.
마침 주변 다른 엄마가 아이 손에 과자를 한 움큼 쥐어줘 할머니와 제법 긴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집이 다른 지역에 따로 있는데 아이 돌볼 사람이 없어서 아들네 집으로 들어오게 됐다는 사연부터 시작해 손주 돌보는 애로사항, 대기업에 다니는 아들과 며느리 이야기까지 할머니는 마음 속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셨다.
특히 손 하나 까닥하지 않는 아들과 며느리 이야기를 하실 때에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담담하게 말씀하시는 할머니와 달리 나는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평일은 회사 다니느라 바쁘니 집안일과 아이 돌보는 것을 할머니에게 맡겼다 쳐도 양심상 주말에는 본인들이 알아서 해야 되지 않을까.
돈을 받고 일하는 베이비시터들도 주말이면 쉬는데 할머니는 휴식은 커녕 주말에도 아들과 며느리 밥 차리고 뒤치다꺼리한다고 맘 편히 쉬지도 못하신다니 며느리는 그렇다치고 할머니의 아들이 괘씸했다.
열무김치 담가야 되는데 아이 쫒아다니느라 못했다고 걱정하시는 할머니께 집안 일과 반찬 만드는 것은 전문으로 하시는 분 쓰라고 하자 아들이 싫어한다는 거다.
집 안에 다른 사람 오는 것도 싫어하지만 음식은 할머니가 만들어주는 것 아니면 손도 안대서 어쩔 수 없이 할머니가 다 할 수 밖에 없다고 말씀하시는데 나도 모르게 손이 바르르 떨렸다.
할머니는 행여 아들에게 흉이 될까싶어 얼른 며느리로 화제를 옮기셨지만 가만 보면 며느리가 그런 것도 다 아들 때문이다. 아들이 엄마를 종 부리듯이 부리는 데 며느리라고 잘 모실까.
할머니의 아들은 자기 엄마가 힘든 게 진짜로 안 보이는 걸까? 아니면 못 본 척 하는 걸까?
이런 일들은 비단 이 할머니 집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주변에 보면 할머니의 희생으로 유지되고 있는 집들이 꽤 많다.
양가가 모두 지방이어서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는 나홀로 육아족인 나로서는 할머니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집들이 부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멀리 떨어져있어서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안 그랬으면 나도 부모님께 아이는 물론 집안일까지 맡겼을테니 말이다.
물론 어머니와 함께 사느라 힘든 아들과 며느리의 애로사항도 충분히 알고 있지만 일단은 할머니가 아이를 봐주시는 것 하나만으로도 무조건 감사해야 한다.
피붙이만큼 안심하고 아이를 맡길 만한 곳도 없기 때문이다.
아들과 며느리에 이어 손자까지 뒷바라지 하느라 힘들어하는 할머니 이야기 듣다보니 가슴이 답답했다.
자식에 대한 무조건적인 희생이 사랑이라고 철썩 같이 믿는 할머니의 어긋난 사랑도 문제지만 따지고 보면 할머니가 손자 돌볼 사람이 없어서 사는 집을 놔두고 아들네 집으로 들어가게 만든 이 사회가 문제다.
‘아이 한 명을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데 우리나라는 어떻게 된 게 ‘엄마’ 아니면 ‘할머니’의 희생이 있어야만 아이가 자랄 수 있으니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제발 우리나라도 다 함께 아이 좀 제대로 키워보자.
언제까지 다 늙은 어머니께 불효를 저지르게 할 셈인가.
바둥거리는 아이를 힘겹게 안고 가시며 연신 땀을 훔치시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보며 문득 궁금해졌다.
과연 할머니에게 아이를 맡긴 자식들은 할머니의 힘겨운 낮 생활을 짐작이라도 할까?
이수연 < 한국워킹맘연구소 소장 >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