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 회장이 2007년 '샌드위치론'(앞서가는 일본과 쫓아오는 중국 사이에 낌)을 제기한 지 6년 만에 삼성 안팎에서 '제2의 샌드위치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사활을 건 일본의 반격과 추격 속도를 높인 중국 사이에서 생존 위협을 받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주력 계열사인 삼성전자가 지난해 연 매출 200조 원의 최대 실적을 냈지만 올해 상황은 녹록치 않다. 일본 업체들은 '엔저'를 바탕으로 공세에 나섰다. 중국은 산업고도화를 통한 품질로 삼성을 따라오고 있다. 글로벌 기업 삼성의 현주소와 10년 후 미래를 짚어본다. <편집자 주>
① 살아나는 일본 기업 … 기습 반격 '깜짝'
② 中 추격 속도 빠르네 … 저가· 저사양 '옛말'
③ '10년 후 삼성' 이끌 성공 오너십 이어갈까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요즘 말이 없다. 이 부회장은 원래 말수가 적은 편이다. 하지만 지난해 말 정기인사에서 부회장으로 승진한 뒤 더욱 말을 아끼고 있다. 취재진과 마주치는 일이 있어도 답변은 커녕 눈 한번 맞추는 일조차 없다.
1년 전 스티브 잡스 애플 전 창업자의 추도식에 다녀오는 길에 "애플과 2014년까지 부품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며 존재감을 드러내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최고위 경영진에 오른 만큼 행동에 신중을 기하는 것이란 분석이 많다. 일부에선 외부와의 지나친 담쌓기라는 지적도 나온다.
◆ 부회장 승진 후 침묵행보…이재용 체제 아직?
재계 안팎에서 이 부회장이 아버지 이건희 회장의 뒤를 이어 삼성을 이끌 것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부회장 승진으로 승계에 가속도가 붙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재용 체제'가 연착륙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선 의문을 갖는 시각도 있다. '이재용식' 경영 색깔을 보여준 적이 없다는 점과 승계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책임경영에서도 거리가 있기 때문.
영국의 유력일간지 '파이낸셜타임즈'(FT)는 지난해 12월 삼성 인사 직후 '삼성전자의 후계자가 승진했다'(Samsung Electronics heir promoted) 제목의 기사에서 "이 회장의 외동아들인 이 부회장이 이번 승진으로 세계 최대 기술회사인 삼성의 최고경영자에 한 발 더 다가갔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이 부회장이 20년 전부터 후계자 수업을 받아온 만큼 경영권 승계가 예상됐던 일"이라고 평했다. 또 한편으론 이 부회장이 초기 전자상거래 사업(e삼성)에서 실패한 일 등을 거론하며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는 의견을 함께 전달했다.
"지금까지 모든 것을 해온 것은 이 회장으로, 이 부회장은 아무런 책임을 진적이 없고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준 적도 없다"는 증권사 애널리스트의 분석을 덧붙이기도 했다. 200억 원 이상의 적자를 냈던 e삼성의 실패(2000년)가 여전히 이 부회장을 따라다닌다.
현재 이 부회장은 삼성전자 최고위 수뇌부라는 직함과 달리 등기이사가 아니다. 주요 경영 사항에 대한 결정권을 가진 이사회의 등기이사는 법적 책임이 따른다는 점에서 중요한 자리다. 일각에선 이 부회장이 오너일가라는 권한만 있을 뿐 책임은 없다는 비판도 나온다.
현대자동차를 비롯해
신세계,
CJ 등은 오너일가가 주력 계열사의 등기이사로 등재돼 책임경영을 하고 있다. 이 부회장과 비슷한 연배의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이나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역시 일찌감치 등기이사를 맡고 있다.
오는 3월께 열릴 삼성전자 주주총회에서 이 부회장이 등기이사에 오를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 높다. 삼성 내부에선 "아직 정해진 것은 없다"고 확대 해석을 경계하고 있다.
◆ 아시아 대표기업 日 도요타도 오너家 책임경영
오너의 책임경영은 우리나라 재벌기업의 특징 중 하나다. 전문경영인이 한계가 있는 대규모 투자나 적극적인 인재채용, 사회공헌활동 등이 오너의 책임경영 아래 이뤄진다.
업종은 다르지만 삼성전자와 함께 아시아를 대표하는 도요타자동차를 보면 오너 책임경영이 얼마나 무겁고 중요한 지 알 수 있다. 작년 연말 도요타 가문의 4대인 도요다 아키오 사장은 콜린 파월 미국 전 국무장관과 만난 자리에서 "내 경우에 사장(社長)의 '사'(社)자는 사죄(謝罪)의 '사'(謝)자였다. 이걸 감사(感謝)의 '사'자로 바꾸고 싶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2010년 대규모 리콜 사태 등을 겪으면서 주주와 고객, 근로자 등을 상대로 사과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아사히신문은 전했다.
2009년 6월 도요타 사장에 취임한 그는 이듬해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차량결함과 대량리콜 사태에 대해 미 하원 청문회에서 "전적으로 책임 지겠다"고 밝혔다. 기자회견에 직접 나서 머리 숙여 사과하는 일도 꺼리지 않았다.
이 때 일을 두고 도요다 사장은 "사장의 역할은 뭔가 결정하고 책임을 지는 일이라는 걸 배웠다"고 말했다. 이어 "3초 안에 직감으로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많았다" 며 "직감으로 결정할 때는 그 결정 탓에 고생하게 될 이들의 얼굴을 우선 떠올리곤 한다"고 밝혔다.
삼성 관계자들은 회사와 관련한 주요 이슈가 터질 때마다 "(이 부회장은) 등기이사도 대표이사도 아닌데, 굳이 앞으로 나설 이유가 없다"는 말을 자주 한다. 이 부회장이 언론에 조금씩 오르내리던 전무 시절에도, 사장으로 승진한 뒤에도, 부회장 타이틀을 단 뒤에도 삼성 측 답변은 한결같다.
전무 재직 때인 2008년
삼성중공업 화물선의 태안 기름 유출 사건이 터졌다. 부회장으로 승진한 직후인 지난 달에는 삼성전자
화성 반도체 공장에서 불산 누출 사고가 발생했다.
삼성의 주력 계열사인 삼성전자는 지난해 연매출 200조 원을 달성하며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 섰다. 브랜드 가치로는 세계 9위에 올라 도요타 자동차를 앞섰다. 그럼에도 이 회장은 올초 신년사에서 "중국은 경제대국으로 성장했고 일본의 기술력도 여전하다" 며 "10년 안에 삼성의 사업이 모두 사라져 버릴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10년 뒤, 2020년 삼성의 미래는 이 부회장이 앞으로 보일 행보에 많은 부분 달라지게 된다. 삼성의 미래 먹거리가 될 신수종 사업도 그가 책임지고 능력을 입증해 보여야 할 과제다. 재계 한 관계자는 "이 부회장에 대한 본격적인 평가는 이제부터 시작" 이라며 "포스트 이건희 시대로 가기 위해선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고 지적했다.
한경닷컴 권민경 기자 k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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